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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리처드 니스벳, ‘생각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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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수많은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스치듯 지나는 찰나에도 상대의 분위기에서 수만 가지 정보를 읽어낸다. 상대의 얼굴을 보고 컨디션을 짐작하는 일에는 꽤 익숙한 우리지만, 막상 “관상을 볼 줄 아느냐”는 질문에는 막막해진다. 그러면, 얼굴 읽기가 ‘관상’이란 단어 앞에선 유독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질이나 성격을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운명까지 읽어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성격과 운명, 이 두 개념의 기저에는 동서양 사고방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고양이, 소, 풀 세 가지 그림 중 두 개를 골라 보자. 대개 동양인은 소와 풀을 선택한다. 소가 풀을 먹는다는 관계에 주목하여 대상 간의 연결고리를 중시하는 맥락적이고 전체론적 사고체계이다. 소와 고양이를 묶는다면 두 대상이 포유동물이라는 개별 속성에 집중하는 서양식 사고방식을 기저에 두고 있다. 동양은 전체 맥락과 관계를, 서양은 대상 자체의 본질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관상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눈이 큰 사람을 볼 때, 서양식 사고는 눈의 크기나 모양 같은 개별 속성에 집중하여 감성이 풍부하고 자기표현에 적극적이라고 읽는다. 동양적 관점은 이를 얼굴 전체의 조화 속에서 읽어낸다. 만약 눈이 너무 커서 얼굴의 균형을 깨뜨린다면, 감성적인 성격이 오히려 애정과 재물 등 인생의 굴곡을 만드는 원인이 된다고 해석하는 식이다. 즉, 동양의 관상은 기질이라는 씨앗이 세상이라는 토양과 만나 어떤 길흉화복을 일궈낼지 전체론적으로 조망하는 기술이다. 성격 그 자체보다, 그 성격이 인생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세상과 부딪히며 만들어낼 삶의 무늬를 맥락적으로 파악하는 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관상학은 인간을 이해하는 유용한 학문이 될 수 있다. 특히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에서 빛을 발하는데, 인물의 외양 묘사가 곧 서사의 중심을 잡는 벼리가 되기 때문이다. 생김새 속에 성격과 주제, 나아가 전체적인 구성까지 긴밀히 녹아 있어 그 자체로 많은 복선을 암시한다. 우리가 공유하는 보편적 인간상에 부합하는 인물 묘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 독자나 관객은 캐릭터에 깊이 공감하며 감동한다. 연극, 드라마 등 모든 매체에서 배역에 맞는 외모와 연출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듯 작품 속 관상학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확인하는 아름다운 믿음(美信)이 되지만, 현실에서 무리하게 운명을 예언하려 들면 자칫 허황된 미신(迷信)으로 전락하기 쉽다.
관상으로 과거의 흔적이나 현재의 상태, 심지어 가까운 미래 정도는 온갖 통찰력을 발휘해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불확실함 때문에 관상으로 운명을 재단해 보는 일은 여전히 흥미로운 일이다. 관계와 맥락을 중시하는 동양인이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관상을 통해 삶의 맥락과 운명까지 짚어보려 한다.
얼굴을 본다는 것은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생김새와 기질을 도식화하여 분석하는 방식은 흥미롭지만, 복잡한 인간의 성격과 삶을 완벽히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성에 내재된 무한한 다양성을 온전히 읽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관상을 특정 틀로 규정짓기보다, 서로 다른 삶이 지닌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살아가는 인생의 순리를 인정하고, 그 고유한 내면과 소통할 때, 아름다운 믿음(美信)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