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의 미학자 故 조요한(1926-2002)이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로 상경할 때 고향 누이의 소개로 김환기 화백의 집에 머물며 처음으로 미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호기심을 품었다. 김환기는 영민한 그에게 당시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미학’을 공부할 것을 권했지만, 조요한은 학문하는 기초를 닦는 일이 먼저라 생각해 철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이 권유는 그의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그는 결국 50세를 조금 넘겨 ‘예술철학’을 집필하며 자신의 미학적 입장을 정립했고, 작고 3년 전에는 평생 붙들고 있던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유를 ‘한국미의 조명’(1999)으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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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조요한 선생의 생전 모습.
이인범 제공 |
그는 미술을 대할 때 철학자였기에, 미술사학자처럼 사실과 양식을 정리하기보다는 언제나 어떤 판단이나 의미가 성립하기 이전의 조건과 근거로 되돌아가려 했다. 이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그것이 쉽게 정의될 수 없는가를 끝내 숙고하게 만든다. 그의 글이 남기는 짙은 여운은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대학에서 교직을 내려놓으며 했던 마지막 강연에서, 조요한은 플라톤의 비유를 빌려 이성과 감성이라는 두 마리 말을 모두 붙잡으려 했으나 어느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에게 ‘이성’은 철학이었을 것이고, ‘감성’은 미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최근 소장 학자들이 그를 기념하는 학술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미학적 성취가 여전히 현재형임을 보여준다.
조요한은 평생 마음속에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는 문장을 품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이 격언은, 아름다움이 단순히 보기 좋은 것, 감각적으로 쾌락을 주는 대상이 아니라 이해하고 사유하며 도달해야 하는 어떤 경지임을 뜻한다. 쉽게 소비되고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인식이 이 짧은 문장 속에 응축돼 있다.
신문에 현대미술에 대한 칼럼을 기고하며 첫 글로 조요한을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를 기리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동시대에 벌어지는 일들을 정보나 사실로 소비하기보다, 그 이면에 작동하는 생각과 조건, 맥락을 함께 짚어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새해가 밝았다. 올해 역시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미술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주요 비엔날레, 그리고 대형 아트페어에 이르기까지 미술계는 새해를 맞아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부산 또한 예외는 아니다. 재개관하는 부산시립미술관과 대형 전시를 준비하는 부산현대미술관, 부산비엔날레와 아트부산 등 굵직한 행사들이 준비 중이다.
이 모든 행사가 접근하기 쉽고 편안하기를 바라지만, 많은 전시는 여전히 어렵고 난해할 것이다. 무릇 아름다운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이 지면을 통해 그것들을 쉽게 풀어주겠다고 말할 수도 없다. 친절한 설명만으로 해소될 문제도 아니며, 열린 결말을 지향하는 현대미술의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다만 위태롭고 불확실할지라도, 현대미술로 건너가기 위한 작은 징검다리 하나쯤은 되어보고자 한다.
낯선 작품 앞에서 잠시 멈춰 서게 될 때, 이 글들이 판단을 대신하기보다 사유의 방향을 가늠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또 이 지면을 통해, 어렵지만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