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마다 두 번은 계절앓이를 한다. 봄앓이와 가을앓이. 그것들은 열한두 살 때부터 환갑 넘은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데 버젓한 손님 같다. 괜스레 왔다가 며칠 지나 훌쩍 떠나버리는, 부담을 주진 않지만 뭔가 미련을 남기는.

봄앓이는 눈으로부터 시작된다. 봄볕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때문이다. 아지랑이는 지면 온도가 오르면 지표면의 따뜻한 공기가 상승하면서 옅은 연기같이 아른거려 보이는 대류 현상일 뿐인데, 이게 나를 앓게 만든다. 햇빛 좋은 봄날, 벌판의 먼 풍경이 형용하기 어려운 빛으로 아른거리는 걸 보기만 하면 몸은 연체동물같이 흐느적거리고 정신은 몽롱해지는 게 봄앓이의 증상이다.

가을앓이는 코에서 발병한다. 어릴 적 외갓집에서 피어오르던 솔가지 연기 때문이다. 매캐하면서도 특유의 솔향이 나는데, 이걸 맡으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게 가을앓이의 증상이다. 상처를 주지 않고 되레 평온한 몽상으로 빠져들게 만든다는 점에서 봄앓이와 가을앓이의 공통점이 있으나, 아련한 후유증을 남긴다는 점에선 가을앓이가 좀 더 심한 편이다. 원인으로 치자면 내가 자란 곳은 들판 마을이고 외갓집은 산골 마을이라 그렇지 않나 싶다.

내 고향은 함안 ‘둘안’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둑으로 싸인 들판 한가운데 있는 마을이다. 그런 연유로 아지랑이는 자주 보기 마련이라 봄앓이를 하되 깊게 배이진 않는다. 늘 같은 걸 보거나 같은 냄새를 맡는 사람은 그걸 별로 느끼지 못하듯이. 그러다 외갓집을 가게 되면 평소 맡지 못하던 솔가지 연기에서 나는 냄새를 동구에 이르기 전부터 맡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외갓집만 솔가지 연기를 내뿜는 게 아니라 그 동네 전체가 솔가지를 땔감으로 썼기 때문이다.

들판 마을인 우리 동네에선 주로 짚이나 마른풀을 땔감으로 썼는데, 불에 태워봤자 가까이에선 냄새가 좀 나긴 하나 그다지 멀리 퍼지진 않는다. 하지만 외갓집 동네에서 뿜어내는 솔가지 연기에 실린 솔향은 엄청나게 멀리 퍼졌다. 게다가 70년대엔 산림보호 정책으로 통나무 같은 건 베지 못하도록 엄하게 단속했지 않은가. 그로 인해 장작이 아니라 죽어서 떨어진 솔가지나 솔가리를 끌어모아 땔감으로 썼는즉, 화력은 장작에 미치지 못했으나 연기와 솔향은 더 깊고 널리 퍼져 나갔다.

그 시절 이맘때 우리 식구들은 외갓집으로 갔다. 큰외숙모 슬하엔 자식이 없는 데다 고구마 캐려면 일손이 부족해 우리 식구들이 가서 고구마 캐는 일손을 거들어야 했으므로. 큰외숙모께서 친자식처럼 생질들을 아껴주어서 좋았고, 논마지기가 없어 겨울을 나려면 식량 걱정이 태산 같던 우리 가족 처지론 일손 거들어주고 고구마를 가마니째로 얻어오면 배부른 생각에, 손수레 끌고 외가 동네에 이르기만 하면 솔가지 연기가 나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몸이 붕 뜨는 느낌에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마음은 평온해지는, 희한한 가을앓이가.

올해도 가을앓이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백패킹을 떠나 영동선 석포역에서 승부역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승부리 마을을 지나는데 도로변 민가에서 솔가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에 실려 온 솔향을 킁킁 맡으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연기 나는 집을 엿봤더니, 노인장이 마당 한쪽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불을 피우고 있었다. 장작에 불이 잘 붙도록 불쏘시개로 솔가리를 썼는지 매캐하면서도 강한 솔향이 코를 찔렀다. 그 순간 아련한 몽상으로 빠져들며 내 사지가 연체동물 팔다리 같아지면서 배낭 무게를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어쩌겠는가.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는 그 희한한 가을앓이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토록 어정거리다 승부역에서 떠나는 오후 5시30분 열차를 놓치고 말았다. 뭐 그게 대수랴. 기왕 가을앓이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승부역 맞은편에 있는 정자에 텐트를 친 다음, 산비탈에서 떨어진 솔가지 대여섯 개를 주워 들곤 강변으로 내려왔다. 물가에 홀로 앉아 연기에서 나는 솔향을 어지간히 맡으려고, 솔가지 하나씩에 불을 붙여 자진 가을앓이를 했다. 아무런 아픔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