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 전면 시행 1년, 현장의 목소리는 복잡하다. 한 교사가 필자에게 털어놓았다. “아이들이 듣고 싶은 과목을 개설해 주고 싶은데, 시간표를 짜는 것만으로도 밤을 새웁니다. 출결 관리, 평가 기준 마련, 생활기록부 기록까지 더하면 수업 준비는 언제 하라는 건지….” 학점제는 학생에게는 선택의 자유를, 교사에게는 업무 과중을 동시에 가져왔다. 이 딜레마를 풀지 못하면 제도의 이상은 현장에서 좌초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부산시교육청이 내놓은 해법은 주목할 만하다. 지난달 부산교육연구정보원은 ‘교수학습 지원용 생성형 AI 서비스(BeAT)’를 도입했다. 교사의 수업 설계와 평가 개발, 학생 피드백을 지원하는 도구다. 동시에 시교육청은 ‘업무자동화(RPA) 프로그램 개발대회’를 열어 성적, 출결, 각종 신청서류를 자동 처리하는 설루션을 발굴하고 있다. 별개의 사업 같지만, 이 두 정책은 하나의 전략으로 읽힌다. 수업의 질은 AI로 높이고, 행정의 짐은 자동화로 덜어내겠다는 것이다.
교육정책의 언어로 말하면, 부산의 실험은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푼다. 첫째, 학습권 보장이다. 학생이 원하는 과목을 들으려면 다양한 강좌를 개설해야 한다. 소수·심화 과목은 시간표 편성을 복잡하게 만드는데, AI 기반 시간표 추천과 분반 자동화가 이를 완화한다. 둘째, 교사 전문성 강화다. RPA가 반복 작업을 처리하고 BeAT가 교안과 평가도구를 제안하면, 교사는 수업 설계와 학생 상담에 집중할 여력을 되찾는다. 셋째, 형평성이다. 인프라와 인력이 부족한 학교일수록 다양한 과목을 열기 어렵다. 디지털 도구가 이 격차를 줄인다면 지역과 학교 규모에 관계없이 학생 선택권을 실질화할 수 있다.
우려도 크다. 중앙정부가 추진한 ‘AI 디지털 교과서’는 오류와 보안 논란 끝에 현장 수용성을 얻지 못했다. 기술이 앞서고 현장이 뒤따라가는 구조는 혼선만 낳는다. 부산의 실험이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데이터 거버넌스다. 학사 정보, 출결, 평가 데이터가 표준화되고 안전하게 연계되어야 한다. 둘째, 현장 적합성 검증이다. BeAT와 RPA를 학점제 업무 흐름에 맞춰 파일럿 테스트하고 오류를 즉시 수정해야 한다. 셋째, 형평성 장치다. 디지털 역량이 약한 학교에 우선 지원하고, 권역 공동교육과정의 교통비와 시설비를 제공해야 한다. 넷째, 교사 전문성의 보장이다. AI는 의사결정을 ‘대체’가 아닌 ‘보조’해야 하며, 평가와 피드백의 최종 책임은 여전히 교사에게 있다.
최근 교육부는 고교학점제 운영 개선 대책을 통해 출결·평가 제도를 조정하고 AI 기반 학사 시스템 고도화를 제시했다. 부산의 현장형 실험은 중앙 정책과 정합성을 갖는다. 다만, 성공 열쇠는 ‘작동하는 작은 것부터’라는 원칙이다. 강좌 개설 신청과 심의를 자동화하는 RPA를 먼저 도입하고, BeAT로 수행평가 루브릭 초안을 만들어 교사가 수정하도록 돕는 식이다. 거창한 시스템보다 일상의 불편을 해결하는 도구가 현장의 신뢰를 얻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학습자 주도성(learner agency)을 미래 핵심 역량으로 강조한다. 학생이 학습을 설계하고 선택하는 힘을 키우려면 교사가 그 과정을 세심하게 지원해야 한다. 디지털 도구는 교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게 돕는 조력자여야 한다. 부산 실험이 이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의미 있는 선례가 될 것이다.
앞으로 몇 달이 중요하다. 권역별 시범학교를 지정해 ‘학점제 통합지원 스택’을 테스트하고, 교무실 야근 시간과 강좌 개설 수를 측정해 효과를 검증해야 한다. 데이터 보안과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고, 형평성 우선 배치 원칙을 지켜야 한다. 무엇보다 교사와 학생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수정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학교에서 교사가 밤늦게 시간표를 고민하는 대신 아이들과의 대화에 시간을 쓸 수 있다면, 학생이 원하는 과목을 포기하지 않고 배울 수 있다면, 디지털이 교사를 돕고 교사가 학생을 돕는 선순환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부산 교육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실험의 의미일 것이다. 변화는 거창한 담론보다 작지만 확실한 실천에서 시작된다. 오늘 할 수 있는 조치부터 흔들림 없이 나아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