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7월 부산에서 국내 최초로 열리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의 올해 정부 예산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유산청이 올해 집행 가능한 예산을 한 푼도 확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16일 국가유산청 국정감사에서 밝혀졌다. 내년 초 실사단 방문과 준비 작업에 차질을 빚을까 걱정스럽다. 국가 행사를 지방자치단체인 부산시 예산에 의존하는 기형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예산 집행 문제를 넘어 정부 무책임과 지역 홀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이다.

지난 7월 15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회의에서 내년 세계유산위원회 개최지로 부산이 선정되자, 한국 대표단이 환호하고 있다. 부산시 제공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는 196개 협약국 대표단과 유네스코 사무총장 등 국제 고위급 인사가 대거 참석하는 명실상부한 국제 행사다. 성공적 개최는 대한민국 위상을 높이고, 유네스코와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할 것이다. 나아가 개최도시 부산의 문화적 가치와 브랜드를 세계에 알리는 절호의 기회다. 그럼에도 지난 7월 유치 확정 이후 연말까지 의제 발굴 연구 용역, 국내외 홍보 등에 필요한 예비비 신청조차 하지 않은 국가유산청 행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유산청은 내년 예산안에 178억 원을 반영했다는 말만을 반복하며 “내년 1월부터 즉시 예산을 투입할 예정”이라고 해명했다. 내년 1월과 4월에 유네스코 실사단이 방문할 예정이다. 이에 대비한 사전 준비로 경비 지출이 불가피하다. 올해 하반기부터 가동할 준비기획단 운영 경비도 집행해야 한다. 예산 한 푼 없이 실사단을 맞는 것은 국제행사 주최기관으로서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와 달리 부산시는 추경예산 5억2000만 원을 편성하고 내년에도 8억 원을 마련했다. 국가 행사임에도 지자체 돈과 노력으로 초기 단계를 치르는 셈이다. 이는 마치 국가가 유치 성과만 가져가고, 그 책임은 지자체에 전가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이번 사태가 ‘서울이 아닌 비수도권에서 열리는 국제행사 홀대’라는 과거 비판을 다시금 소환한다는 점에서 더 우려스럽다. 2014년 부산에서 열린 ITU(국제전기통신연합) 전권회의에 예산이 삭감되며 ‘홀대론’이 제기된 바 있다. 국가 중요 사업이나 국제 행사가 비수도권에서 개최될 때마다 예산과 관심에서 멀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면 균형발전은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예비비 미신청이 “조직 확보 등 협력 체계 구축이 더 급했기 때문”이라는 국가유산청 변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실무 집행을 위한 예산 확보 없이 어떻게 협력 체계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이라도 유산청은 국회 지적을 무겁게 받아들여 즉시 기획재정부에 예비비 신청이나 긴급 전용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예비비는 이럴 때 신청하라고 있는 것이다. 국가재정법에 나와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필요 예산을 마련해야 한다. 부산시와 긴밀히 협력해 성공적 개최를 위한 동력을 확보하길 바란다. 준비 기간을 허송세월하며 국제 망신을 자초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