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미국 이민당국이 공개한 조지아주 한국 배터리 공장(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단속 장면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 그것도 혈맹이라는 미국에서 수갑과 쇠사슬에 묶인 채 머리를 박고 서 있는 모습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다. 이들은 현지 공장 건설 작업을 기한 내 마무리 하기 위해 파견된 근로자들이다. 이 공장에 한국 돈 수조 원이 들어갔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제조업 르네상스’ 협력을 다진 게 불과 열흘 전이다. 미국의 표적 단속이 이 정상회담 이면에서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더 놀랍다.

미국이 한미 관세 협상을 하루 전에 취소하기도 하고 정상회담 당일 아침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대뜸 한국 특검을 비난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물밑에서 진행 중인 관세 교섭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길들이기 차원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한국이 단순히 돈을 대는데 그치지 말고, 공장을 건설 운용할 직원도 미국인으로 채우라는 압박임은 분명하다. 미국의 제조업 부활 드라이브는 방법만 달랐지 오바마와 바이든 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일이다. 오바마나 바이든은 보조금이나 세금 감면(인플레이션감축법·반도체법) 같은 ‘당근’을 이용했다면, 트럼프는 관세와 이민자 단속이라는 ‘채찍’을 휘두를 뿐이다.

이 와중에 제일 황당한 건 우리 정부와 기업이겠지만 부산 울산 경남도 그에 못지 않다. 부울경이 ‘마스가(미국 조선업 회생 프로젝트)’를 필두로 한미 제조업 동맹의 최대 수혜지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기 때문이다.

한국이 트럼프 2기 행정부와 약속한 투자액은 조선 자동차 반도체 원전 배터리 핵심소재 등에 700조 원 가깝다. 내년 우리나라 1년 예산(728조 원)에 버금가는 액수다. 울산은 조선 자동차, 경남은 조선 원전 우주항공 방산의 본산이다. 자동차 조선 원전 방산의 전후방기업 상당수가 부산에 있다. 한미 제조업 협력 아이템 거의 대부분이 부울경 기업에 강점이 있는 분야라는 의미다. 마침 한국 1호 조선사인 HJ중공업을 비롯해 조선기자재 관련 주식이 일제히 급등세를 타며 분위기가 무르익던 참이다.

‘굴뚝 산업’이라 일컫는 제조업은 정보통신이나 금융·서비스업보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그래서 혁신과 개혁 대상으로 지목되는 산업군이었다. 그러나 전통이냐 첨단이냐 차이가 있을 뿐 여전히 제조업은 국가와 세계 경제를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제조업이 약한 미국과 영국은 휘청거렸지만 제조업 기반이 강한 독일이나 일본은 비교적 선방했다. 곧 성장 한계에 다다를 거라던 세계의 공장 중국은 날이 갈수록 승승장구다. 미국이 중국 소재 한국 반도체 기업을 제재할지언정 대만의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인 TSMC는 건드리지 않는다. TSMC는 대만의 호국신산(護國神山·나라를 지키는 신령스러운 산)이다.

제조기업의 가치는 그 회사 하나에 한정되지 않는다. 현대자동차만 봐도 1차 협력사만 250여 개사이고 2, 3차와 구매협력사까지 합하면 1만 여개 사에 달한다. 수백 수천 곳과 협업하는 조선회사도 마찬가지다. 그것도 공장을 지어 돌리고 물건을 만드는 데만 그렇다. 상품 제작 이전 단계인 기술 개발과 자금 조달, 완성 후 운반 유통 판매 수출까지 이르면 건설 교통 물류 에너지 금융 통신 부동산 등 거의 모든 산업 요소가 총망라 된다. 이게 전부 일자리다.

제조업식 밸류 체인 생태계 구축은 무형의 정보나 데이터를 거래하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구글 메타 아마존 같은 빅테크로는 한계가 있다. 한국의 ‘네카라쿠배(네이버 카카오 라인플러스 쿠팡 배달의민족)’ 같은 인터넷 기반 플랫폼 기업도 만들어내기 힘들다. 제조업의 흥망성쇠가 그 제조업이 소재하는 도시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 하는 이유다.

미국의 이번 한국인 근로자 단속은 다행히 단기간에 마무리 국면에 들어가긴 했다. 그러나 미국이 자국 이익을 위해 무슨 일을 벌일 수 있는가 그 적나라한 본색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트럼프 노믹스’ 설계자로 알려진 피터 나바로 백악관 고문은 “디트로이트와 중서부 반쯤 비어있는 공장을 꽉 채우는 것”이 자신들의 목표라고 말했다. 이른바 ‘러스트벨트’의 완벽한 복구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방부’를 ‘전쟁부’로 이름을 바꿨지만, 실제 전쟁은 통상과 제조업에서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 1기와 2기를 합하면 한국의 대미 투자 혹은 투자 약속 금액은 1000조 원에 이른다. 미국의 제조업 끌어 당기기가 한국과의 윈윈 게임이 될 지, 제로섬 게임일 지 아직은 불투명하다. 부울경으로선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맞았다. 깨질 듯한 유리바닥 위를 걷는 기분이다.

강필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