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소비자, 또 소비자”를 강조하며 금융소비자 보호 필요성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모든 금융업무에서 소비자 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고 했고, 불법 추심이나 해킹 등 민생 침해 금융범죄에 대한 현장 검사까지 직접 챙기며 강력한 감독 기조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는 소극적인 소비자 보호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현실은 냉혹하다. 지난 8년간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금융분쟁 민원은 26만 건이 넘었지만, 실제 분쟁조정위원회로 회부된 건은 고작 139건에 불과했다. 수십만 건의 민원이 사실상 방치되는 구조에서 금융소비자는 권리 구제를 받기 어렵고, 제도의 허점만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서민과 은퇴 고령자들이다. 평생 모은 퇴직금이나 쌈짓돈을 은행 창구에서 권유받아 투자했지만, 위험성이 큰 상품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아는 경우가 허다하다. 은행이나 증권사는 “안정적이다” “수익률이 높다”는 말로 소비자를 현혹한 뒤 겨우 한 두장짜리 요약 설명서로만 상품 소개를 한다. 그럼에도 손실이 발생하면 “투자자가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한다. 필자가 현재 진행 중인 금융기관 상대 소송에서도, 증권사는 한 장짜리 설명서를 내밀며 투자자를 모집하곤 손실이 커지니 소비자가 경솔하게 선택했다는 식의 변명을 한다.
법원 역시 이러한 현실을 지적한 바 있다. 최근 한 지방 법원은, 판매 직원이 고객 대신 계좌를 운용하면서 필수적인 고지를 누락한 행위가 명백한 위법이라고 판단했다. 법원은 이 경우 회사에 사용자책임을 인정했고, 투자자 과실만으로는 금융사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는 금융사의 상투적인 항변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판결이다.
문제의 근본에는 과도한 영업 실적 압박이 있다. 창구 직원이나 PB들은 매달 정해진 판매 목표를 채워야 하기에, 고객의 위험 선호도나 이해 수준을 고려하지 못한 채 고객에게 무리한 권유를 일삼고 있다. 금융사는 영업 성과와 인센티브를 최우선으로 하고, 고객은 그 구조적 문제의 희생양이 된다. 투자자들은 ‘전문가의 권유’라는 말을 믿고 투자하지만, 되레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는 낙인을 찍히는 기막힌 현실에 놓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우선 판매사의 설명의무 위반이 드러나면 소비자가 아니라 금융사가 스스로 설명을 다했다는 점을 입증하도록 법적 구조를 바꿔야 한다. 또한 분쟁조정위원회 제도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소비자가 조정안을 수락하면 금융사가 반드시 이를 따르도록 하는 구속력 있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나아가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도입도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불완전판매로 인해 서민의 전 재산이 날아가는 현실에서, 기업에 실질적 경각심을 주려면 손해배상 범위와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최근 정부가 추진 중인 금융소비자보호원 신설 역시 중요한 변화다. 지금까지 금융소비자보호 기능은 금융감독원 산하의 한 부서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독립적 기구로 분리해 검사권과 제재권을 갖춘 전문 기관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금융소비자보호원이 출범하면 은행 증권 보험 등 전 금융권을 아우르며 불완전 판매와 불공정 영업행위에 대한 조사와 제재, 분쟁 조정, 금융교육과 정보 제공까지 담당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금융소비자 보호를 실질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길이다. 물론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감독 혼선과 이중규제를 우려할 수도 있지만, 해외 주요국의 사례를 보면 오히려 독립적 소비자보호기구의 역할이 금융시장 안정과 신뢰 확보에 큰 기여해 왔다. 미국의 소비자금융보호국(CFPB), 영국의 금융행동감독기구(FCA)가 대표적이다.
금융소비자는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다. 전 재산을 걸고 투자하는 서민과 은퇴자들이 금융사의 무책임한 영업행태로 손실을 떠안는 현실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금융은 신뢰 위에 서는 산업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한 장짜리 설명서와 형식적 고지로 책임을 피해 간다면, 신뢰는 다시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소비자의 신뢰를 저버리는 금융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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