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을 맞아 미니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70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7주간의 과정을 통해 모든 참가자가 50~70페이지 분량의 얇은 자서전을 출간하는 커리큘럼이었다. 수영동 오디오도서관에서 기획·운영했는데 우연히 기회가 되어 프로그램의 강사 겸 편집자 역할을 맡았다. 어르신 생애의 절반도 살아내지 않은 상태에서 프로그램을 잘 이끌어갈 수 있을지 좀처럼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첫 수업이 열렸고 어르신들을 처음 만났다. 대부분 70, 80대였고 심지어 올해로 만 90세인 분도 있었다. 청년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는 유난히도 많아 보이던 나의 나이가 한없이 작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이제 80이 넘으니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다못해 자식들에게 전해줄 유서라도 잘 쓰고 싶어요.” “제가 살아온 얘기를 자식이나 손주한테 하고 싶은데 다들 관심도 없어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책으로 잘 정리해서 선물로 주고 싶습니다.” “이미 100장 넘게 제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이번에 잘 추리고 엮어서 책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첫 수업을 맞아 자기소개 시간과 함께 어떤 계기로 프로그램에 참석했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이 과정에서 어르신 한분 한분의 절절한 사연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든, 어떤 성취를 이루었든, 어떤 배경과 맥락을 가지고 있든, 삶의 후반기에 지나온 나날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만은 모두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어서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으냐고 질문했는데 다양한 답변이 돌아왔다. 어렸을 적 부모님과의 추억, 학창 시절, 직장 생활, 결혼 생활, 자녀 혹은 손주에 관한 에피소드 등 개인적인 이야기도 있었고 한국전쟁과 같은 굵직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이들의 삶은 파란만장했던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통과한 만큼 무수히 많은 아픔으로 점철돼 있었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개개인은 자그마한 존재였기에 이들의 이름은 교과서 혹은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이들은 역사를 온몸으로 온전히 경험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역사를 만든, 우리가 일상에서 수없이 마주했을지도 모르는 평범한 영웅이기도 했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프로그램의 의미가 문득 새롭게 다가왔다. 단순히 흥미나 취미 수준에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 이들은 언젠가 삶의 끝자락을 맞이할 때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기록하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글쓰기는 세월의 흔적에 빛이 바랜 이야기 조각을 모아 백지 위에 옮기는 일이었다. 이러한 글을 모아 책으로 엮는다는 것은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굉장히 특별한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역사 앞에서 한없이 작은 한낱 개인일지라도, 삶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세상에 당당히 이야기하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는 책이 그 무엇보다 잘할 수 있는 일, 어쩌면 책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각종 통계를 보면 60세 이상 노년층의 독서율은 다른 연령대에 비해 낮게 나타나는데 얼핏 보면 어르신들은 책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비쳤다. 실제로 프로그램에 참가한 어르신들 역시 책을 읽고 싶어도 노안이 와서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다만 책을 쓰고 싶다는 이들의 욕망은 무척 강했다. 독서율이 높은 청년층과 비교하더라도 결코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들은 비록 독서 인구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책 쓰기를 갈망하며 언제든 책을 쓸 준비가 되어 있는 일종의 ‘예비 작가 인구’에 가까웠다. 삶의 흔적을 책으로 남기려는 열망은 독서율 통계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마음이었다.
프로그램이 무사히 끝나면, 역사보다는 그 규모가 작을지 몰라도 단단하고 묵직한 이들의 개인사가 자그마한 책에 담겨 올해 가을쯤 세상 밖에 나올 예정이다. 소장용 책이기에 배우자 자식 손주를 비롯해 가까운 지인에게만 가닿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독자가 많지 않더라도 이들의 삶은 ‘책’이라는 물성을 가진 존재로 누군가의 서재에 자리 잡은 채 긴 주기로 읽히고 또 읽히지 않을까. 책은 이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불어넣은 생명의 숨결을 이어받아 세상에서 오래도록 살아 숨 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