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대통령이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없다고 못 박았어.”

1987년 4월 모 사단 신병교육대 퇴소식 때였다. 당시 훈련소 동기의 가족이 주위 눈치를 살피며 ‘바깥 소식’을 전했다. 고(故) 박종철 열사의 49재 때 진행된 ‘3·3 평화대행진’ 당일 군입대 차 강원도로 향한 뒤 처음 들은 ‘바깥 소식’.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1987년 6월 항쟁이 뜨겁게 타올랐다. 당시 부산은 전국에서 가장 뜨겁게 폭발했다. 결국, 당시 여당이던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 선언’이 나왔다. 국민이 직접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다. 1987년 10월 29일 9차 개정헌법, 즉 현행 헌법이 공포됐다. ‘87년 체제’의 시작이었다.

‘87년 체제’는 올해로 38년째다. 87년 체제는 국민의 민주화운동이 일궈낸 개헌이자 정치권에 의한 편의적 헌법 개정 없이 10년 이상, 아니 40년 가까이 유지되는 ‘체제’로 유일하다. 이는 87년 체제가 우리 헌정사에서 퇴색할 수 없는, 기념비적 의미를 지닌 까닭이다. 87년 체제는 5년 단임제의 대통령 직선제, 소(小)선거구제,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폐지, 헌법재판소(헌재)와 국정감사 부활 등 ‘절차적’ 민주주의 구현에 필요한 요건을 갖췄다. 하지만 87년 체제는 장기집권을 막는 데 치중했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어서 태생적 한계가 있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갖추는 데는 충분치 못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87년 체제 이후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시대 상황은 급변했다. 2년 뒤에는 그 ‘강산’이 네 번째 바뀐다. 특히 대통령에 과도하게 집중된 통치시스템은 그동안 숱한 역기능을 양산했다. ‘제왕적 대통령으로 시작해서 식물 대통령으로 마친다’는 말까지 나온다.‘12·3 비상계엄’에 따른 헌재의 대통령 파면결정은 87년 체제 속 제왕적 대통령제의 민낯을 재차 확인해줬다. 헌정사상 헌재의 대통령 파면결정은 2017년에 이어 두 번째다. 낡은 체제는 시대와 충돌한다. 인공지능(AI) 시대에 386 컴퓨터를 쓸 수 없는 노릇이다. 옷이 몸에 맞지 않으면 바꿔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87년 체제가 한계에 달했다는 얘기는 숱하게 나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집권 2년 차이던 2018년 3월 대통령 4년 연임제, 선거의 비례성 원칙(국회의 의석은 투표자의 의사에 비례해 배분) 등을 담은 정부개헌안이 발의됐던 것도 87년 체제를 더는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30년이 넘은 헌법으로 국민의 뜻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게 당시 개헌안 발의 배경이었다. 야당의 반대에 부딪혀 정부개헌안의 국회 통과는 좌절되긴 했지만….

87년 체제를 바꾸자는 여론은 2018년 정부개헌안 발의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지배적이다. 중앙일보가 한국갤럽에 의뢰해 지난달 24, 25일 시행한 여론조사(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4명 대상으로 휴대전화 가상번호 면접방식으로 조사.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결과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 또는 연임으로 바꾸는 개헌이 필요하다는 질문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60%. ‘반대한다’는 응답은 31%에 각각 달했다. 20대를 제외한 모든 연령층에서 개헌에 찬성한다는 비중이 높았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 2018년 3월 정부개헌안 발의에 앞서 8개 여론조사 내용을 토대로 펴낸 ‘개헌 관련 여론조사 분석’ 보고서에 의하면 ‘개헌 찬성’, ‘개헌 필요’ 의견이 62.1%∼76.9%에 달했다. 또 정부 형태에 대해서는 대통령 4년 중임제가 모든 조사에서 40∼50%의 지지를 얻은 것으로 조사됐다.

87년 체제의 한계는 비단 권력구조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중앙집권형 조직은 완전한 지방자치, 즉 지방분권의 걸림돌이다. 지역소멸 위기가 현실화하는 판국이다.

이에 새로 취임한 이재명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이 답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6·3 대선의 후보 시절 ‘5극 3특’ 공약을 내놨다. 5극인 5대 초광역권은 수도권 동남권 대경권 중부권 호남권이다. 권역별로 특별지방자치단체를 꾸려 광역급행철도를 건설하겠다고 했다. 3특인 제주 강원 전북 등 3대 특별자치도를 위해선 자치권한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공약했다. 세종 행정수도 완성과 임기 내 제2차 공공기관 이전의 조속 추진도 약속했다. 또 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공약도 내놓았다. 지역 소멸을 막자는 취지로 지역 주도의 행정체계 개편을 추진하는 밑그림 역시 그린 바 있다.

이러한 정책은 헌법에 지방분권을 담을 때에야 힘이 실린다. 지방분권을 담은 개헌의 국민투표는 내년 지방선거와 함께 시행하면 재정적·행정력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이미 초안은 문 전 대통령의 재임 다시 발표된 정부안이 있으므로 이를 다듬으면 된다. 87년 체제 극복에 관한 숙의를 기대한다.

오광수 편집국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