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초연됐던 연극 ‘불가불가(不可不可·극작 이현화)’는 역사적 굴곡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 비겁한 권력을 풍자한다. 병자호란 무신정변 을사늑약 등 치욕적인 대사 앞에서 우리 지도자들은 ‘갑론을박’만 벌인다. 이 작품은 이런 지도자를 황산벌 전투를 앞두고 고뇌하는 계백 장군과 대비하며 미학적 완성도를 높인다.

연극 제목 ‘불가불가’에서 ‘불가’를 강하게 두 번 읽으면 ‘절대 불가’라는 뜻이다. 이와 달리, ‘불가불가’를 입속에서 우물거리면 ‘절대 불가지만 어쩔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불가불-가’처럼 ‘불가불’이라고 말한 다음 잠깐 쉬고 ‘가’라고 하면 ‘불가피하게 가능’이라는 뜻으로 들린다. 이처럼 ‘절대 불가’와 ‘불가피하게 가능하다’란 한 글자 차이도 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초연될 당시에는 거악이 분명했던 시대였고 ‘불가’와 ‘가’의 간극은 컸다. 이른바 민주화 목소리가 세상을 뒤덮었다. ‘절대 불가’라는 입장을 밝혀야 할 때 우리 지도자들은 ‘불가불-가(불가피하게 가능)’라며 물러선다. 선악이 분명한 상황에서 이런 지도자들의 애매한 태도 때문에 국운이 갈렸다는 풍자를 이 작품은 담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최근 부산을 방문해 ‘산업은행 부산 이전 불가’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는 “산업은행 옮기는 게 가능했으면 했겠죠. 그게 됩니까. 정치는 실현 가능한 약속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3년 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동남권 제조업 벨트 중 한 곳인 부산에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 금융기관 산업은행 본사를 옮겨 제조업에 금융을 수혈하려는 취지로 추진됐다. 입법부가 법 개정을 하지 않아 공약이 이행되지 못했다. 입법부 과반 의석은 민주당이 차지한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선악이 분명했던 시기의 ‘절대 불가’를 외쳐야 하는 것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정책 금융 중심지인 부산에, 그에 성격이 맞는 금융기관을 옮겨 제조업 서비스업 금융업 간 시너지를 높이는 일이다. 산업은행법에서 ‘산업은행 본점은 서울에 둔다’는 조항을 삭제하거나 바꾸면 가능하다. 부산 남구 금융단지에 부지도 마련돼 있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 불가’에서 ‘불가’를 한 번 더 말하면 ‘불가불가’가 되고 ‘불가불가’를 되뇌다 보면 ‘불가불-가’가 된다. 산업은행 이전은 이 후보가 황산벌 전투에 나서는 계백 장군처럼 목숨 걸 일이 아니다. ‘불가불가’와 ‘불가불 가’ 사이는 간극은 그렇게 크지 않다.

정옥재 서울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