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소의 중요 업무 중 하나는 금연사업이다. 담배의 해로움을 지역 주민들에게 알리고, 금연클리닉을 통해 흡연자들의 결심을 돕는다. 하지만 편의점에 갈 때마다 계산대 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인 담뱃갑들을 보면서 깊은 허탈감에 빠진다. 애초에 담배를 팔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문제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폐암 판정을 받은 흡연자의 절망 어린 눈빛을 마주할 때면, 생명을 앗아가는 이 모순된 현실에 가슴 한켠이 먹먹해진다.
실제로 흡연은 폐암 발생의 확실한 위험 요인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폐암 사망자의 85% 이상이 흡연과 직접 관련이 있다. 미국 국립암센터도 담배 연기에 포함된 70여 종 의 발암물질이 폐 세포의 유전자 손상을 일으켜 암을 유발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나라 질병관리청은 흡연자의 폐암 발생 위험이 비흡연자에 비해 약 20배 높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 점에서 2014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주요 담배 제조사 세 곳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의미가 크다. 흡연으로 폐암 등 질병을 앓게 된 3465명에게 공단이 지급한 급여비를 배상하라는 것이 요지다. 담배의 유해성에 책임을 묻는 이 소송을 보건소 직원의 한 사람으로서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2020년 1심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패소했다. 재판부가 담배 회사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담배 제조사의 위법 행위나 제조상의 결함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논하지 않겠다. 문제는 재판부가 흡연과 폐암 등 호흡기 질환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충격적이었다. 판사가 ‘담배는 폐암의 원인이 아니다’고 하면 그런 것인가. 세속법이 과학이 밝혀낸 사실에 배치되는 결론을 낼 수 있다는 대담함이 놀라웠다. 이 무슨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구본 돌리다 잡혀가던 시절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인가.
다행히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오는 22일, 담배 소송의 2심 마지막 변론을 앞두고 있다. 이어서 선고 일정도 정해질 예정이다. 부디 이번에는 상식적인 판결이 내려지길 기대한다. 만약 1심과 마찬가지로 담배 회사에 폐질환의 책임이 없는 것으로 판결이 난다면 전국 보건소의 금연사업은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다니는 길목마다 지정된 금연구역도 그 근거가 사라진다. 더 큰 문제는 흡연자들이 담배의 위험성을 가벼이 여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담배 회사들의 제조 공정상에 문제가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 그 분야를 모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담배 회사들이 담배의 유해성을 축소·은폐하려 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면 폐암에 걸릴 수 있다는 건 안다. 아마 담배 회사 사장도 알고 있지 않을까?
이 부조리한 현실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솔직히 쉽지 않아 보인다.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로펌들이 담배 제조사들의 변호를 맡고 있다. ‘담배는 폐암의 원인이 아니다’는 1심 판결은 그들이 과연 최고의 변호사들이란 걸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우리에게는 그들에게 없는 게 있다. 바로 머리 수다. 이제, 다음 세 가지에 동참해 주길 당부한다.
첫째, ‘담소운동’에 참여하자. ‘담소운동’은 ‘담배 소송 소문내기 운동’의 줄임말이다. 흡연의 폐해에 대해 담배 회사의 책임을 묻고, 재판부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범국민 서명 운동이다. 서면으로만 참여할 수 있으니 가까운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에 문의해 보자. 둘째, 서명 운동에 힘을 보탰다면 이제 벽에 걸린 달력을 보자. 아직 4월로 되어 있는가? 잘됐다. 이참에 한 장 넘기고 5월 22일에 ‘담배 소송 2심 최후 변론일’이라고 적어두자. 인터넷으로 관련 기사를 찾아보고, 이후 공개될 선고 기일에도 주목하자. 선고 기일이 정해지면 다시 달력에 표시해 두자. 그리고 시간이 날 때 관련 기사마다 댓글로 재판부가 놓칠지 모르는 의학 상식을 일깨워 주자.
셋째, 흡연자라면 이번 일을 계기로 금연을 결심해 보자. 당신의 폐를 두고 진실마저 왜곡하려는 담배 회사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마음이 드는가. 자존심 상하지 않는가. 혼자서 하기 어렵다면 보건소가 함께 하겠다.
지금, 우리의 폐를 둘러싼 조용한 전쟁, 그러나 결코 조용해서는 안 되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담배가 폐를 파괴한다는 것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 침묵하면 그 희생양은 바로 우리 자신이 될 것이다.
조지 오웰은 ‘1984’에서 ‘무지는 힘이다’는 슬로건을 통해, 진실이 감춰질 때 누가 이익을 얻는지를 날카롭게 꼬집었다. 이제 우리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의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의 폐가 담배 회사 임원들의 두둑한 성과급을 위한 제물로 바쳐지는 비극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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