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을 기점으로, 한국은 미국 에너지부의 분류에 따라 ‘민감 국가’로 지정돼 관련 제한 조치가 발효됐다. 에너지부는 국가 안보, 핵 비확산, 기술 보호 등을 이유로 일부 국가를 ‘민감 국가’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번에 한국도 ‘기타 지정 국가’로 새롭게 포함되었다. 이는 과거에는 없던 변화로, 그 의미와 파장이 작지 않다.
한국은 테러지원국이나 고위험국보다는 우려 수준이 낮은 ‘최하위 범주’에 해당하지만, 이 지정은 한미 동맹 관계는 물론 산업계와 과학기술계에도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나아가 ‘민감 국가’ 지정은 외국인 직접 투자(FDI)에도 영향을 미쳐, 미국 기업들이 한국에 대한 투자에 더욱 신중해질 가능성이 있다. 이는 외국인 투자가 중요한 성장 동력인 한국 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미국 에너지부 대변인은 “민감 국가로 지정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미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며 “해당 국가들 중에는 에너지 과학 기술 테러 방지, 핵 비확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기적으로 협력하는 경우도 있다”고 강조하며 우려를 불식시키려 했다.
하지만 에너지부 규정에 따르면, 민감 국가 소속 연구자들은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 및 프로그램, 관련 정보 등에 접근하려면 별도의 특별 승인을 받아야 한다. 실제로,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들은 ‘방문 6주 전 사전 승인’이 필요한 국가 목록에 한국을 포함시킨 바 있다. 이는 사전 검토와 사후 보고 등의 절차를 통해 보안을 강화하려는 조치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계에서는 첨단 분야의 주요 연구에서 한국이 엄격한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하며, 경우에 따라 배제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원전 등 미국과 긴밀히 협력 중인 기술 산업들이 기술 협력 제한과 위축 우려에 직면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산업계는 공급망 안정성을 확보하고, 미국 중심의 글로벌 가치 사슬 재편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아시아 및 유럽과의 다자 협력을 확대해 기술 의존에 따른 리스크를 분산하는 전략을 구체화해야 한다. 과학기술계는 국제 정세에 흔들리지 않도록 독자적인 기술력을 강화해 나가야 하며,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등 미래 핵심 기술 분야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도전적인 연구 환경 조성을 통해 기술 패권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정부는 ‘민감 국가’ 지정 해제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병행하면서, 기술 보안 체계 정비를 위한 전략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최근 국가과학기술연구회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은 미국 대비 81.5%로 평가되어 사상 처음으로 중국(82.6%)에 뒤처진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우주항공 양자정보 해양과학 등 전략 기술 분야에서 국가 주도의 기술 육성 정책을 통해 빠르게 기술 격차를 좁히고 있다. 이처럼 전 세계가 기술 주권 경쟁에 총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미국의 이번 조치는 한국 과학기술계에 또 하나의 도전 과제를 던진 셈이다.
심화되는 기술 패권 시대에 과학기술은 국가 안보와 생존을 좌우하는 핵심 자산임을 명심해야 한다. 최근 5년간 대한민국 주요 산업에서는 97건의 기술 유출 시도가 있었으며, 이는 23조 원 규모의 경제적 손실로 이어질 수 있는 수준이었다. 첨단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바이오 기술 등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분야일수록 타국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으며, 산업 스파이 행위도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 내부의 보안 시스템 강화, 기술 유출 감시 체계의 고도화, 그리고 유출 발생 시 강력한 법적 제재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단순한 기술 관리 차원을 넘어, 한국의 과학기술 체계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은 국제 동맹을 유지하는 동시에 기술 자립도를 높이고, 글로벌 기술 분업 구조 속에서 자국의 전략적 입지를 강화해 나가야 할 시점이다. 정부 기업 학계가 협력해 중장기 기술 로드맵을 수립하고, 국내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함으로써, 미국 중심의 기술 블록화 흐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독자적 경쟁력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