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가 막바지로 향하던 1942년. 일본 경찰은 한국 방송인들을 무차별 탄압했다. 혐의는 ‘외국 단파방송청취 금지령’ 위반. 경성방송국(현 KBS 모태) 한국인 기술 직원들은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서 보내는 한국어방송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신되는 방송을 몰래 들었다. 이로 인해 경성방송국에서만 약 40명이 체포됐고, 지방 방송국까지 합치면 150명 가까운 한국인 방송인들이 검거됐다. 민간인을 포함하면 300여 명이 수난을 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른바 ‘단파방송 밀청사건’이다.
VOA(미국의소리·Voice of America). 당시 한국인이 청취하다 수난을 당한 미국 단파방송이다. 미국 정부는 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2월 1일 독일어로 VOA 방송을 처음 시작했다. 독일 나치 정권 내부를 교란하고 미국 입장을 알리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VOA는 현재 최대 국제방송국이다. 언론 자유가 없거나 제한적인 지역을 포함한 매주 3억5400만 명의 시청자를 위해 50개 가까운 언어로 방송된다. 2차 대전부터 현재까지 ‘미국식 자유와 민주주의’ 전파의 첨병으로 활용됐다. 그런데 설립 83년 만에 존폐 위기에 봉착했다. 미국 대통령에 의한 위기 증폭은 아이러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4일(현지시간) 글로벌미디어국(USAGM) 조직과 인력을 대폭 줄이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에 USAGM 산하에서 운영되는 VOA, 자유아시아방송(RFA), 자유유럽방송(RFE) 등 6개 매체 대다수 직원이 휴직 처리됐다. VOA에서만 1300여 명의 전체 직원이 유급 휴직에 들어갔다.
트럼프 대통령이 USAGM을 축소시킨 명분은 연방정부 구조조정. 그러나 비판 언론 손보기 차원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그는 VOA 등 공영매체들이 자신의 정책과 치적을 비판만 한다고 여러 차례 불만을 토로했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 하버드대학교 두 정치학 교수가 쓴 책이다. 저자들은 ‘언론·시민단체 등 반대(비판자)에 대한 기본권 억압 시도’를 4가지 민주주의 붕괴 신호 중 하나로 들었다. 나머지는 헌법·선거제 등 민주주의 규범에 대한 거부, 폭력에 대한 조장이나 묵인, 정치 경쟁자에 대한 부정이다. 트럼프 재등장과 존폐 기로에 선 VOA는 미국 민주주의 위기의 뚜렷한 징후다. 벼랑 끝에 놓인 ‘한국식 민주주의 위기’ 역시 권력자의 오도된 인식에서 비롯됐다. 숨죽이며 다시 ‘봄’을 기다린다.
박태우 서울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