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대로다. 비껴간 적 없으니 새롭거나 특별하지도 않다. 지난 14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이른바 ‘명태균특검법’에 거부권(재의 요구권)을 행사했다. 헌법상 명확성·비례·적법절차주의·권력분립 원칙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정부가 ‘헌법 수호’를 방패 삼는 게 적절한지는 차치하자.
윤석열 정부의 거부권 행사는 39번째다. 직무 정지 전 윤 대통령이 25회, 권한대행 시절 한덕수 국무총리가 6회 사용했다. 최 권한대행은 두 달 만에 8번이나 썼다. 출범한 지 3년도 안 됐는데 1987년 민주화 이후 정부 가운데 압도적 기록이다. 이전 정부의 거부권 행사 횟수는 노태우 7회, 노무현 6회, 박근혜 2회, 이명박 1회에 그친다. 김영삼 김대중 문재인 정부는 한 번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역대 정부를 통틀어 이승만 전 대통령의 45회 기록이 깨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윤 대통령이 2년여 남은 임기 전부, 아니 일부만 더 채워도 그럴 가능성이 100%라고 본다. 습관성 또는 중독성 거부권이라 할 만하다. ‘야당의 법안 발의 → 여당의 반대·저지 → 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 통과 → 여당의 거부권 건의 → 대통령(권한대행)의 거부권 행사 → 재의결 → 법안 폐기’가 여의도에서 무한 반복된다.
윤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의 주요 이유로 드는 줄탄핵과도 견줄 만하다. 이번 정부에서 야당 주도로 발의된 탄핵소추안은 29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탄핵 심판에 넘겨진 소추안은 13건이다. 지금까지 결론 난 8건은 모두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됐다. ‘걸핏하면 탄핵’도 보기 좋진 않다. 그러나 본회의 통과를 떠나 발의 건수 전체를 비교해도 탄핵소추보다 거부권이 훨씬 많다. “야당의 탄핵 남발로 국정이 마비됐다”는 윤 대통령 논리를 적용하면, 대통령의 거부권 남발로 입법부 기능도 마비됐다. 더 큰 논란은 거부권 상당수가 윤 대통령과 그 가족을 보호하려 쓰였다는 데 있다. 이제 와서 누가 먼저냐, 누구 책임이 더 큰가를 따지는 건 어리석다. 비상계엄이 발동되고, 위헌적 포고령이 선포되고, 무장한 군인이 국회 앞 장삼이사를 향해 총을 들어 보인 순간 잘잘못을 가리는 건 의미가 없어졌다. 21세기 문명사회 대한민국에서 윤 대통령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탄핵소추가 헌법에 보장된 국회 권한이듯 거부권 역시 대통령 권리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은 신중했다. 민의를 대표하는 입법부를 존중하는 차원이다. 국회의원 전체 표결로 의결하는 탄핵소추와 대통령 혼자 결정하는 거부권은 그 정당성이 다르기도 하다. 무거운 정치적 책임도 따른다. 결국 지난해 4월 22대 총선은 이 정부를 가차 없이 심판했다. 민의를 거스르지 말라고 옐로카드를 들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변하지 않았다. 여당은 ‘거대 야당의 폭주’ ‘입법 독재’ 등을 주장하며 때마다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다. 윤 대통령은 매번 여당 목소리에만 친절하게 화답했다. 22대 국회 개원식엔 아예 불참했다. 국민이 투표로 구성한 국회를 대놓고 무시했다. 민주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시정연설도 거부했다. 국무총리가 대독했다. 국회뿐 아니라 갑남을녀 국민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했다.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마음껏 휘둘렀다. 이것이 윤 대통령이 탄핵 심판대에 선 이유다.
이제 ‘12·3 비상계엄 드라마’의 종영이 가까워졌다. 각본이 몇 번 예상을 벗어나긴 했다. 이 때문에 완전한 종영을 위해선 후속으로 몇 편이 더 이어질 우려도 있다. 어쨌든 돌고 돌아 헌재의 탄핵 심판 선고가 임박했다. 그런데 변수가 아직 남았다. 개헌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탄핵 심판 최후 진술에서 그동안 마구 내둘렀던 막강한 권력을 내려놓을 듯한 취지로 말했다. 그는 “직무에 복귀하게 된다면… 조속히 개헌을 추진해 우리 사회 변화에 잘 맞는 헌법과 정치 구조를 탄생시키는 데 신명을 다하겠다… 잔여 임기에 연연해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제게는 크나큰 영광”이라고 진술했다.
그러잖아도 잔불 지피던 개헌 논의가 윤 대통령 발언으로 활활 타올랐다. 여당이 가장 공격적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뺀 여야 잠룡과 정치 원로도 나섰다. 권력 구조 개편으로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임기를 단축해 4년 중임제를 도입하는 내용이 주류다. 물론 시대에 맞지 않는 ‘87년 체제’는 고쳐야 한다. 하지만 분명히 할 게 있다. 윤 대통령과 여당 중심의 개헌 논의가 내란 혐의를 체제 탓으로 돌리려는, 조기 대선을 의식해 야당의 힘을 빼려는 ‘잔꾀’가 돼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개헌은 탄핵 심판 선고를 지켜본 뒤 차분히 논의해도 늦지 않다. 대한민국의 근본인 헌법을 고치는 일이다. 헌법 위반 혐의를 씻지 못한 지금의 대통령에게 맡길 일은 아니다.
권혁범 편집국 디지털부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