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전쟁 후에 미국 육군참모총장(1945~1948년), 컬럼비아대학교 총장(1948~1953년) 등을 지냈으며, 1953년 1월부터 1961년 1월까지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1953년 12월 8일에 아이젠하워는 유엔총회 연설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Atoms for Peace)’를 제창했다. 연설은 “저는 오랜 세월 직업군인으로 살아오며 결코 언급하지 말았으면 했던 ‘핵전쟁’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로 시작된다. 아이젠하워는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가 단 한 번이라도 기습공격을 한다면 엄청난 피해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군사용 핵 물질의 감축과 제거만을 모색하는 것을 넘어 원자력을 군사용 용도에서 벗어나 평화의 기술로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이젠하워가 표방한 ‘평화를 위한 원자(력)’는 ‘전쟁을 위한 원자탄’과 대비되는 것으로 과학기술의 역사상 매우 성공적인 수사적 전략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연설은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1954~1957년에는 펜실베이니아 주 시핑포트에 세계 최초의 ‘순수 상업용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었고, 1957년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유엔 산하의 독립기구로 발족됐다.
1957년 10월 4일에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자 미국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과학기술 강대국을 자부하던 미국이 인공위성 발사의 선두를 빼앗긴 것은 엄청난 수치로 여겨졌다. 스푸트니크 자체가 당장의 위협은 되지 않았지만, 그것을 쏘아올린 로켓은 핵탄두를 미국 본토로 겨냥할 수 있는 미사일이 될 수 있었다. 당시에 상원 청문회는 스푸트니크 발사를 ‘기술적 차원의 진주만 공습’으로 규정했다.
아이젠하워의 대응은 신속하면서도 포괄적이었다. 1957년 11월 7일에는 ‘과학기술 특별보좌관’이란 직제를 마련했고, 20일 뒤에는 ‘대통령 직속 과학자문위원회’를 설치했다. 1958년에는 고등연구계획국(ARPA) 발족, 국가방위교육법 제정, 국립항공우주국(NASA) 설치 등과 같은 후속조치가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자 제1세대가 미국 유학을 경험할 수 있었던 데에도 국가방위교육법에 입각한 미국의 과학교육 개혁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아이젠하워는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1961년 1월 17일에 고별 연설을 했다. 여기서 그는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의 개념을 꺼내 들었다. “우리는 군산복합체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부당한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이 복합체의 힘이 우리의 자유와 민주적 절차를 위협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어느 것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깨어 있고 지식을 갖춘 시민만이 거대한 산업적·군사적 방위 체제와 우리의 평화적인 방법 및 목표를 제대로 결합시킬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안보와 자유가 함께 번성할 것입니다.”
아이젠하워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균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별 연설의 초반부에서도 균형을 키워드로 내걸었다. “민간부문과 공공부문 사이의 균형, 비용과 이익 사이의 균형, 필수불가결한 것과 부가적 편의를 위한 것 사이의 균형, 당장을 위한 행동과 미래 국가의 안녕 사이의 균형”이 그것이었다.
균형을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이루어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균형을 강조하면서 별다른 일을 하지 않거나 상대방을 탓하기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재임 초반부터 평화의 메시지를 보냈고, 스푸트니크 충격에 대응해 다양한 조치를 내놓았으며, 퇴임할 때에도 당당하게 군산복합체를 거론했다.
이런 점에서 아이젠하워는 아인슈타인의 다음과 같은 경구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으려면 움직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