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가장 잘한 일 하나만 꼽으라면 노동시간 단축을 꼽고 싶다. 2017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어땠던가. “서울의 야경이 아름다운 것은 야근 탓”이라는 우스개가 유행하고,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정치인의 구호가 큰 인기를 끌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 52시간이라고요? 한국도 선진국인데 그렇게 많이 일한다구요?”라며 믿을 수 없어 했다.
그러다 정부차원에서 주 52시간을 밀어붙이자 국민적 열망이 더해져 우리 사회의 노동시간은 순식간에 줄어들기 시작했다. 일부 기업들은 야근시간 단축을 부서장 인사고과에 반영했고, 급기야 오후 6시가 지나면 전산망 접속을 차단해버리는 극단적 조치가 이뤄지기도 했다. 2020년 코로나로 촉발된 재택근무 확산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매일 저녁 8시가 넘어야 퇴근하던 대기업 지인도 이제는 6시면 퇴근해 가족과 저녁을 먹고 근처 공원에서 달리기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의 대세적 흐름은 우리 국민의 관념을 바꿔놨다. “좋아 빠르게 가”를 외치던 윤석열 정부가 흐름에 역행해 주 69시간제를 던져봤지만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대세적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소추된 지금에 이르러 뜬금 없이 정치권이 주 52시간제를 흔들고 있다. 반도체특별법을 통해 반도체 산업에서만 주 52시간의 예외를 허용하자는 것이다.
반도체특별법의 근거를 요약하면 이렇다. 반도체 연구개발을 위해서는 주요 엔지니어의 장기간 집중 근무가 필요한데 주 52시간 제한에 막힌다. 글로벌 반도체업체 엔비디아나 TSMC도 고강도 노동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가 세계시장에서 반도체 경쟁력을 가지려면 주 52시간 예외가 불가피하다.
결국 삼성전자가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 경쟁에서 밀린 건 주 52시간 노동시간 규제 탓도 크다는 것이다. 세계적 기업인 삼성전자가 2025년에 이르러 경쟁력을 높이는 주요 수단으로 야근 확대를 꼽았다니 잘 믿기지 않는다. 1990년대 이건희 회장이 경쟁력 강화 수단으로 아침 7시까지 출근해 4시에 퇴근하는 이른바 ‘7·4제’를 도입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삼성 직원들은 아침 7시에 출근은 했지만 4시에 퇴근하지는 못했고, 이후 2000년대 들어 다시 7·4제를 폐기했다지만 한 번 정착한 조기 출근 문화는 2010년께까지 이어졌다. 이번 근무시간 연장 논의를 보며 90년대에 입사한 삼성전자 임원들이 2025년 판 7·4제를 주장하는 건가 하는 걱정마저 든다. 경쟁력 하락의 원인을 경영실패가 아닌 노동법 규제와 야근을 거부하는 근로자 탓으로 손쉽게 돌리려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지율 하락에 고전하던 야당 대표가 이런 주장에 동조하고 나섰다. “특정 산업의 연구개발 분야 고소득 전문가들이 동의할 경우 예외로 몰아서 일하게 해주자는 게 왜 안 되느냐고 하니 (나도) 할 말이 없더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현행법에서도 이미 근로자 동의 하에 주 52시간 예외를 두는 제도가 존재한다. 물론 이 제도를 시행하려면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하나, 주 52시간 초과가 어디까지나 예외인 점을 고려하면 이는 제도 남용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절차다.
근로자 본인 동의 절차가 있으니 남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순진하거나 악의적이다. 삼성이 7·4제를 시작한 1990년대부터 근로기준법에 연장근로는 근로자 동의를 요건으로 해왔다. 그런데도 기준 근로시간인 주 40시간은커녕 휴일근로는 연장근로가 아니라는 이상한 법해석으로 주 52시간마저 초과한 상시 야근이 일상이지 않았던가. 갑을관계가 명확한 노동현장에서 근로자 동의 요건은 있으나마나 했기 때문이다. 경영계도 주 52시간 초과근로에 대해 ‘근로자 동의’ 요건에 대한 언급은 없고 ‘고용노동부 장관 인가’ 요건만 문제삼고 있다. 약자인 근로자 눈치는 볼 필요가 없고 정부 눈치는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은 헌법에 따라 일하는 국민의 존엄을 보장하는 최소기준을 설정한 것으로 이 법에 미달하는 근로조건은 모두 무효로 한다. 근로자가 동의했거나 심지어 먼저 원했더라도 무효다. 이렇게 강제로 정해놔야만 그나마 지켜지는 게 최소 근로조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밤에 퇴근한 뒤 11시간 연속휴식도 못하고 계속해서 일해야만 지속가능한 사업은 정상적인 상태라 볼 수 없다. 한국 기업들은 2025년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국민과 전 세계가 삼성전자에 바라는 진정한 혁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