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럽게 접근하자면, 지금 한국 영화계는 위기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현재 이 나라에서 위기가 아닌 사안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팬데믹을 거치며 줄어든 극장의 관객, 스크린의 감소, 투자의 경색, 그에 이어 영화발전기금 분담금의 폐지까지. 악재로 가득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를 계속 만나기 위해서는 그 안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영화계에서 가장 중요한 희망의 아이템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미개봉 신작’이다.
올해 가장 기대되는 부분은 한국 영화의 간판 스타라고 볼 수 있는 박찬욱과 봉준호의 신작이 모두 개봉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우연하게도 박찬욱과 봉준호는 같은 해에 새 작품을 개봉한 적이 많았다. 박 감독의 출세작 ‘공동경비구역 JSA’는 봉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와 같은 2000년에 개봉했다. 2003년에는 ‘올드보이’와 ‘살인의 추억’이 개봉해 한국 영화의 세계적 전성기가 출발했다. 2006년에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괴물’이 함께 했고, 2009년 ‘박쥐’와 ‘마더’, 2013년 ‘스토커’와 ‘설국열차’ 가 관객을 만났다.
올해 박 감독의 ‘어쩔수가없다’와 봉 감독의 ‘미키17’이 개봉 예정이다. 두 감독의 신작을 같은 해에 만나는 건 약 12년 만이다. 3월 개봉 예정인 ‘미키17’은 에드워드 애슈턴의 세계적 베스트셀러 SF 소설, ‘미키7’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사망 사고가 나면 계속 복제되는 일회용 인간의 이야기를 다뤘는데,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죽음이 7번 있었다면, 봉 감독은 무려 10번을 더 죽이는 모양이다. 현재의 미친 환율로 따질 때 대략 2200억 원의 제작비가 소요된 거대 블록버스터다. 봉 감독의 세계 시장에 대한 진검승부인데, 일련의 블록버스터들과는 차별된 봉준호만의 색깔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손예진과 이병헌이 출연하는 것으로 일찌감치 기대를 모은 박찬욱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그리스 출신의 거장 코스타 가브라스의 2005년작 ‘엑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아내와 두 자녀를 둔 한 가장이 어느날 해고되고, 재취업을 위해 라이벌들을 하나씩 살해한다는 끔찍한 내용인데, 당연하겠지만 박 감독은 이 이야기를 자신만의 잔혹 유머와 짙은 사회성으로 그려낼 것이다. 이변이 없는 한 5월의 칸, 혹은 8월의 베니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 될 것이다.
그 외에도 궁금한 한국 영화가 많다. ‘엑시트’로 재기발랄한 연출력을 선보였던 이상근 감독은 독특한 설정의 오컬트 코미디로 예상되는 ‘악마가 이사왔다’를 선보일 예정이다. ‘엑시트’에서 뛰어난 연기력은 물론 액션까지 소화한 임윤아와 부산 출신의 인기 배우 안보현이 주연으로 출연한다.
‘미녀는 괴로워’ ‘광해’ ‘신과 함께’ 시리즈 등 한국식 블록버스터의 명가 리얼라이즈 픽쳐스의 신작은 ‘전지적 독자 시점’이다. 싱숑 작가가 쓴 전대미문의 히트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의 영화판이다. 대략 300억 원의 제작비가 소요된 이 작품은 제작 전 단계부터 엄청난 기대를 받아왔다. 이민호 나나 지수 등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배우들이 출연하며 한국 영화에서 자주 만나기 힘들었던 스케일과 소재를 어떻게 영상화 했을지 궁금한 작품이다. 또한 민규동 감독의 ‘파과’ 역시 기대를 모은다. 구병모 작가의 소설 ‘파과’를 바탕으로 했다. 노인이 된 여성 킬러와 젊은 남성 킬러의 대결이라는 로그라인을 지닌 이 영화에는 60대 배우 이혜영이 주인공이다. 한국 영화의 캐스팅 구도를 파격적으로 뒤튼 결과물이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독립영화계에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온 윤가은 감독의 신작이 가장 보고 싶다. 후반 작업중인 ‘세계의 주인’에는 최근 인기와 연기력 모두 무시무시한 배우 고민시가 출연한다. ‘평범한 여고생에게 갑자기 닥치는 뜻밖의 이야기’라는 간단한 로그라인이 알려져 있지만, 단순한 스릴러나 일상물은 아닐 것이다. 윤 감독은 그동안 어린이들이 주연한 독립영화 ‘우리들’과 ‘우리집’을 통해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연출과 세계관을 보여준 바 있다.
한국영화의 ‘영화로운’ 시절을 만들어 낸 거장 감독들로부터 앞으로 그들의 자리를 채울 미래의 감독들까지, 2025년의 극장가를 풍요롭게 채워줄 것을 소망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