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사직야구장. 프로야구 롯데와 현대의 경기에서 롯데 외야수 정수근이 몸을 날려 안타성 타구를 걷어냈다. 하지만 일어난 정수근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당시 사직야구장 외야에는 요즘 같은 부드러운 천연 잔디가 아니라 딱딱한 인조 잔디가 깔려 있어 찰과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그날 사직야구장에 허남식 시장이 방문했다. 경기 후 정수근은 허 시장에게 찰과상을 입은 팔을 보여주면서 잔디 교체를 건의했다. 잔디 교체는 롯데 구단과 선수, 팬들의 염원 중 하나였다. 허 시장 눈앞에서 정수근이 몸을 던진 것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결국 사직야구장에 천연 잔디가 깔렸다. 10억 원이 투입된 잔디 교체가 사직야구장 준공 후 20년 만에 겨우 이뤄졌을 만큼 스포츠 인프라에 대한 인식이 낮았다.
천연 잔디로 교체된 지 20년 지났다. 내년이면 사직야구장 나이가 마흔이 된다. 더는 이대로 버틸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다. 물론 그동안 재건축 논의가 꾸준하게 이어졌다. 용역까지 마쳤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재건축 논의가 사라졌다. 일명 실종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사건은 아무런 인과 관계 없이 발생하지 않는 법이다. 재건축 실종 사건에도 원인이 있었다. 짚어보자.
2017년 2월 부산시는 1억5000만 원을 들여 ‘종합운동장 재배치 및 공간 활용 방안 수립 용역’을 시작했다. 당시 기자가 기사를 썼기 때문에 상황을 잘 알고 있다. 핵심은 리모델링과 재건축 가운데 경제성과 실현 가능성이 큰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롯데 구단도 적극적이었다. 그룹 차원에서 논의해 투자를 하겠다는 의지를 거침없이 피력했다. 이미 삼성과 KIA가 각각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와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를 건설할 때 투자한 전례가 있었다. 재건축 문제는 급물살을 탔다. 새롭게 들어서는 사직야구장 장기 임대 해법 같은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부분까지 검토했다. 대체 야구장도 물색했다.
갑자기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시는 2018년 3월 용역 결과를 공개하면서 개폐형 돔구장으로 짓겠다고 발표했다. 예상 밖 결정이었다. 개방형으로 건설하면 1000억 원대에 가능한 건설비가 개폐형 돔구장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3500억 원으로 어마어마하게 뛰었다. 건설비 중 무려 2200억 원을 민자로 진행하겠다고 했다. 심지어 위치도 사직동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고 했지만 강서구 대저동의 제2 벡스코 후보지나 기장군 오시리아 관광단지 등 다른 지역도 물색한다며 판을 계속 키웠다. 이 계획이라도 밀어붙였다면 2023년 착공해 2026년 개장할 것이다.
그런데 불과 석 달도 안 돼 상황이 급변했다. 그해 6월 지방선거에서 개폐형 돔구장을 결정했던 서병수 시장이 낙선하고 오거돈 시장이 당선돼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시는 인수위원회에 오거돈 시장 당선인의 공약에 따라 북항 재개발 예정지에 개방형 야구장 건설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보고했다. 순식간에 야구장 형태와 위치가 바뀐 것이다. 여기서 사실상 사직야구장 재건축 문제는 중단됐다고 보면 된다.
그 뒤 6년이 흘렀다. 그동안 사직야구장 재건축은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상태였다. 최근까지 장기 표류 사업으로 분류됐다. 그러는 동안 서울시는 잠실야구장 재건축 사업에 속도를 내 돔구장을 짓기로 했고, 대전에는 내년 3월 신규 야구장 ‘베이스볼 드림파크(가칭)’가 문을 연다. 이 정도면 사직야구장 재건축 실종 사건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시는 20일 사직야구장 재건축 계획을 발표했다. 그동안 숱한 논란에 휘말렸던 형태와 위치, 대체 야구장까지 나름대로 정리했다.
지나간 시간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2017년 용역을 시작할 때만 해도 재건축은 일사천리로 이뤄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욕망과 욕심이 투영되고 뱃사공이 늘어나면서 실종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번에는 꼼꼼하게 진행해 다시는 실종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하듯 부산시는 부산 야구팬만 보고 가야 한다.
김희국 스포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