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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백제를 마주하다

차경애 전 KBS 아나운서

  • 차경애 전 KBS 아나운서
  •  |   입력 : 2024-10-29 19:46:44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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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가 각 지역에서 한 달 살기다. 그러나 아직 챙겨야 할 가족이 있으니 한 달씩 집을 비우기가 어려워 차선책으로 한 달에 한 번 3, 4일 지역 여행을 한다. 첫 여행지는 경주였다. 혼자 걷고 보고 먹으며 천천히 신라를 둘러봤는데 그때 만난 얼굴무늬 수막새의 미소는 지금도 깊은 울림을 준다.

충청도는 방문할 기회가 적었다. 특히 공주와 부여 땅은 한 번도 밟아 본 적이 없으니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대전역에 도착하자마자 성심당 빵집을 찾았다. 아뿔싸 오늘이 1년에 딱 하루 쉬는 날, 전 매장이 휴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그래 여행은 예측 불허고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숙소에 짐만 맡기고 계족산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황토 2만여 t을 투입해 만든 황톳길이 있는데 맨발걷기 성지 같은 곳이라서 꼭 한번 와보고 싶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우중의 황톳길이 아주 멋스럽다. 게다가 이 황톳길을 만든 ㈜ 선양소주 조웅래 회장을 우연히 만나 사진까지 찍었으니 역시 여행길엔 뜻밖의 만남도 있는 거다.

다음날부터 부여와 공주 여행을 시작했다.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약 700년간 이어진 한국의 고대 왕국이다. 고려 500년 조선 500년 백제는 700년 역사이니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까? 연대순으로 보면 공주를 거쳐 부여로 가야 하지만 일정상 부여를 먼저 방문했다.

부여박물관에는 백제 문화의 정수인 국보 백제금동대향로가 있는데 백제인의 예술 감각과 뛰어난 공예기술을 보여준다. 뚜껑 꼭대기에 봉황을, 몸체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에는 신선과 다양한 동식물, 악사와 상상의 동물까지 아주 정밀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금속 공예 장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백제 기술의 시작은 구구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2011년 사비성터에서 구구단 목간이 발견됐는데 삼사십이(三四十二)와 같이 구구단 공식이 쓰여있고 2단부터 9단까지 칸을 나누어 구구법을 기록한 걸 보면 당시 중국보다 더 체계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밖에 남성용 요강인 호랑이 모양의 호자를, 머리를 살짝 옆으로 돌려서 만든 걸 보니 재치 만점의 백제인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역사테마파크인 백제문화 단지를 거쳐 백제의 정원인 궁남지를 돌아보는데 지금 봐도 참 예쁘다. 드디어 구드래 선착장에서 황포돛배를 타고 낙화암으로 갔다. 백화정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백마강은 유유히 흐르는데 바위가 무척 험하다. 암벽에 새겨져 있는 낙화암 글씨가 그날을 기억하듯이 여전히 진한 붉은색이다.

공주(웅진)는 고구려와의 전투에 패하면서 옮긴 두 번째 왕도다. 2015년 공산성과 무령왕릉 등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는데 공산성은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천연의 요새로 성곽길을 따라 걸으니 고대왕국 백제가 펼쳐지는 듯하다.

무령왕릉은 고대 왕릉 중 무덤의 주인이 확인된 유일한 왕릉으로 1971년 배수로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6호분 옆에 쌓인 벽돌을 치우니 한 번도 도굴되지 않은 1500년 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입구에 놓여있던 진묘수를 비롯해 묘지석 장신구 생활용품 등 46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돼 백제의 사회 문화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공주박물관에서는 무령왕릉의 출토품을 비롯해 구석기시대부터 마한 백제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충남의 역사와 문화도 살펴볼 수 있었다.

끝으로 나태주 시인의 풀꽃문학관에 들렀다. 작은 고택인 문학관에서 가끔 치신다는 풍금 위에는 과꽃 악보가 놓여있고 마당에는 할미꽃 금낭화 복수초 등 풀꽃들이 피어있었다.

글을 쓰며 다시 백제 여행을 한다. 700년의 역사를 어찌 며칠로 다 알 수 있겠냐마는 이제라도 찾아가 만난 것이 다행이다. 화이불치 검이불루(華而不侈 儉而不陋). 화려하지만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는 삼국사기의 글이 백제를 말해준다. 그리고 그 백제의 미학은 나태주 시인의 시로 이어져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풀꽃처럼 백제의 문화도 자세히 보고 오래 보니 예쁘고 사랑스럽다. 햇살 같은 시처럼 백제의 하늘과 땅이 내 맘속에 깊숙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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