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감정이 모멸감(侮蔑感)이라고 한다. 사람이 다른 이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감정 폭력이므로 ‘정서적인 원자폭탄’이라 불린다. 모멸은 업신여기고 얕잡아봄, 모멸감은 모멸스러운 느낌이다. 역사적인 배경과 사회적 맥락을 더하면, 모멸감은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하될 때 갖는 괴로운 감정이며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의 응어리다.(‘모멸감-굴욕과 존엄의 사회학’·김찬호). 모멸감과 대척점에 있는 존엄을 찾는 건 우리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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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대통령이 정치를 하면서 내건 공정과 상식이란 기치에 의구심을 느끼는 국민이 많아지고 있다. 부인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의혹 대처가 미흡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임기를 절반이나 남긴 윤 대통령 집권 하반기 전망도 밝지 않다. 사진은 전국이 대체로 흐린 날씨를 보인 28일 오전 안개에 갇힌 서울 도심이다. 이날 부산도 하루종일 비가 오락가락했다. 연합뉴스 |
2014년 12월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은 모멸감을 우리 사회가 뒤집어쓴 사례다.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이 기내 서비스를 문제삼아 자신이 탄 여객기를 회항시킨 초유의 사태다. 이를 곱씹는 까닭은 아직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인 폐습과 압축 성장 과정에서 응축된 갈등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종축엔 귀천 의식과 신분적 우열 관념이 똬리를 틀고 있다. 급격한 산업화와 급변한 사회 환경이 더해졌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매겨지는 사회가 다른 한 축이다. 정치·사회제도와 경제력 간의 불균형, 삶의 형태와 의식 사이의 부정합이 문제의 핵심이다. 모멸감의 정치를 낳는 토양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여러 의혹이 모멸감을 소환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가 한 인터뷰에서다. 조 대표는 ‘품격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권력을 쥐락펴락한다’는게 윤석열 정부 우군인 보수층이 모멸감을 느끼는 이유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 대표는 김 여사와 명태균 씨를 꼽았다. 이게 윤 대통령과 각을 세우며 정치에 입문한 조 대표만의 생각이 아님은 여론조사로 확인된다. 지난 25일 나온 한국갤럽의 윤 대통령 국정 지지율은 20%로 또 최저치다. 부산 울산 경남이 27%, 대구 경북이 26%다. 직무 수행 부정 평가는 70%를 찍었는데 김 여사 문제(15%)가 가장 컸다. 야당이 ‘심리적 탄핵’을 넘어 공공연히 ‘탄핵’ 주장을 펴는 까닭이다.
윤 대통령 부부가 자초했다. 특히 명 씨와 관련한 의혹이 덧쌓이면서 폭발 수준이다. 도이치 주가조작 의혹과 명품백 수수에 대한 검찰 방탄 비난이 증폭되는 가운데 공천 개입과 대선 여론조작 의혹까지 더해졌다. 국정감사 과정에서 불거진 ‘주술’ 논란은 귀를 의심케 했다. “윤 대통령은 칼을 잘 휘두르는 장님 무사, 김 여사는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주술사라 장님의 어깨에 올라타서 부리라는 얘기를 명 씨가 김 여사에게 한 것으로 안다.” “명씨는 김 여사와 영적 대화를 많이 한다고 했다.” ‘명태균 사태’를 촉발한 강혜경 씨가 명 씨에게서 들었다며 전한 말이다.
더 고약한 건 명 씨 입에서 나온 ‘탄핵’이다. 앞서 명 씨는 “철없이 떠드는 우리 오빠 용서해주세요. 무식하면 원래 그래요” “제가 명 선생님께 완전 의지하는 상황” 등 김 여사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공개하며 자신이 구속되면 “대통령 하야·탄핵”이라는 협박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모두 진위 여부를 떠나 상식을 뛰어넘어도 한참 뛰어넘는 몰상식이다.
윤 대통령의 대처에 ‘이게 공정이냐’고 묻는 국민이 많다. 김 여사 지키기에 ‘공정과 상식’을 내팽개친 건 아니냐며 의구심을 키운다. ‘선공후사’가 아니라 ‘선처후공’이란 지적이다. 윤 대통령이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회동에서 한 대표가 김 여사와 관련해 제기한 세 가지 사항을 거절한 것이 그 예다. 한 대표는 김 여사 대외 활동 중단, 대통령실 인적 쇄신, 김 여사 관련 의혹 설명 및 해소 등을 요구했으나 빈손 회동으로 끝났다. 여권 공멸의 위기에도 대화 타협 소통이라는 정치의 기본을 망각했다는 힐난이 쏟아진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 사용한 적이 있다.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와 빨간 커플티를 입고 부산 서면에서 합동 선거운동을 한 사실을 상기하며 썼다. 2021년 12월 6일 선대위 출범식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선대위는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 김병준 이준석 상임선대위원장 체제로 꾸려졌다. 이 대표와 갈등을 접고 대선 승리에 힘을 모으자는 취지였다. 그러고 보니 김종인 이준석을 윤 대통령에게 이어준 사람이 바로 명 씨란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가능성이 대화하고 소통하며 더하는 일이지 결코 뺄셈을 하는 게 아니라면 윤 대통령이 먼저 변해야 한다. 정치 부재, 고립무원을 초래하는 대통령을 보며 국민은 모멸감을 더 느낀다. ‘백성이 화가 나면 배(임금)를 뒤집을 수 있다’는 금언은 예나 지금이나 유효하다. 국민의 존엄이 그만큼 엄정하다. 젊은이 159명이 서울 한복판에서 목숨을 잃은 이태원 참사 2주기를 맞는 오늘, 윤 대통령은 가능성의 예술을 위해 공정과 상식이란 초심을 되찾아야 한다. 아직도 임기가 절반이나 남았다.
정상도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