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이 분신한 1970년 11월. 박정희 정권은 어머니 이소선(1929~2011) 여사에게 3000만 원을 건넸다. “아들 시신을 넘기라”는 요구와 함께. 반정부 시위 확산을 우려해서였다. 이 여사는 자식들 의견을 묻는다. “정부가 태일이 시신을 가져가는 조건으로 3000만 원을 제시했다. 그 돈이면 너희들 학비도 대고 형편도 풀릴거다.” 중학생이던 전태일 여동생 순옥이 “그 돈 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불안해 한다. “오빠를 팔아먹는 거다.” 당시 전태일 월급이 2만 원이었다. 판잣집 살던 이 여사는 집 10채에 버금가는 현금을 거부하고 평생 노동운동의 가시밭길을 걸었다(살림터 ‘왜 전태일인가’ 발췌).
전태일 분신에 대학가가 반응했다. 서울대 법대생이던 장기표는 시신이 안치된 명동 성모병원을 찾아 이 여사에게 “이제서야 왔다”고 사과한다. 전태일은 생전 ‘대학생 친구 하나 있으면 원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졸업 못한 그에게 법률 용어로 가득찬 ‘근로기준법 해설서’가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 소원이 생을 마감하고서야 이뤄졌다.
장기표는 대학 선배 조영래 변호사에게 전태일 죽음을 알렸다. 당시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조영래는 서울대에서 열린 전태일 추도식에 참석한다. 1971년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으로 1년 6개월 옥고를 치른 그는 1973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간 도피 생활을 하면서 전태일 평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해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영원한 재야’ 장기표(78)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이 22일 담낭암 투병 중 별세했다. 경남 밀양 출신인 고인은 평생 노동·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9년의 수감 생활과 12년간 수배 생활이 신산했던 삶을 대변한다. 고인은 1980년대 민주통일국민회의 창립을 주도했다. 1990년엔 재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진보정당인 민중당을 창당했다. 그때 함께 했던 동지가 이명박 정부 실세 이재오 전 의원과 윤석열 정부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다.
고인은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7차례 출마해 모두 낙선했다. 2020년에는 보수정당인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후보로 경남 김해을에 나서 ‘변절자’ 논란에 휩싸였다. 최근에는 국회의원 특권폐지 운동을 이끌었다. 역대 대통령들이 ‘한자리’ 주겠다고 해도 대부분 거부했다 한다. 이소선 여사는 2011년 세상을 떠나기 전 “기표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진실하고 바르게 살려는 첫 사람이자 나에게 영원한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지금쯤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를 꼭 안아주고 있지 않을까.
이노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