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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치유의 숲에서 만난 손기정

이명래 미 오이코스대 교수·산림치유지도사

  • 이명래 미 오이코스대 교수·산림치유지도사
  •  |   입력 : 2024-01-07 19:39:23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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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의 일이다. 손기정 선생님의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책 기사가 취준생인 나의 눈에 들어왔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서울 남산에서 광화문 앞 출판국으로 뛰었다. 마라톤책을 구하기 위해 마라톤으로 단숨에 달렸다. 10월 연휴 끝 무렵 딸아이가 손 선생님 영화를 봤다고 전해왔다. 순간 ‘부산치유의 숲’ 대왕참나무가 나의 뇌리에 일렁였다.

대학 졸업 반 시절은 취업원서를 넣고 필기 면접시험 준비로 분주했다. 그 와중에 손 선생님 책을 밤사이 독파했다. 이튿날 아침 손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서울시청 뒤 대한체육회 지하 다방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15분쯤 일찍 나갔다. 그런데 다방 안쪽에 연한 붉은 색의 안경을 낀 손 선생님이 먼저 와 계신 것이 아닌가. 한 소절 한 소절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선수단은 일본에서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과 신의주를 거쳐 유럽횡단 열차로 베를린에 도착했다. 마의 언덕 비스마르크 고개를 넘는데 따가운 가을 햇살마저 쏟아져 기진맥진했다. 이때 다뉴브강에서 한 줄기 바람이 스쳐 갔다. 신의주 압록강 변의 어머니가 같이 지나갔다. 일제에 강점된 조국도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어디서 힘이 났을까. 단거리 선수 못지않은 속력으로 결승점을 내달렸다.

나는 은퇴 후 우연히 산림치유사 국가 자격증 안내를 보았다. 몇 가지 지원조건 중 보건의료 관련 석·박사 출신이 눈에 띄었다. 중국에서 유학한 중의학 석사 학위증을 제출했다. 3개월여 동안 주말에 부산과 진주 경상대를 오가며 양성반 과정을 이수했다. 울고 웃던 8년 유학의 결실로 산림청의 자격증을 가슴에 품었다. 지난해부터 부산치유의 숲에서 치유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다. 처음으로 산림치유 현장에서 대상자를 맞이했다. 현장 경험이 미약한지라 막상 대상자를 맞으려니 가슴이 두근댄다.

때마침 천안아산역에서 본 플래카드가 뇌리에서 살아난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시구절이다. 대상자를 위해 옷차림은 어떻게 하지? 그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감물을 들려준 모시적삼이 앞에 놓였다. 아내가 풀을 먹여 칼칼하다. 어느 정도 워밍업이 되었건만 막상 현장에서 프로그램을 잘 진행해 낼지 가슴은 마른 낙엽으로 바스락거렸다. 마지막으로 동선 점검을 위해 숲길을 걸었다. 불안감을 해소시킨 것은 우연히 눈길이 간 대왕참나무였다.

치유의 숲길 대왕참나무 앞에 대상자인 어르신들과 같이 선다. 손기정 선생님이 베를린 마라톤 우승 기념으로 히틀러로부터 받은 것도 대왕참나무 한 그루였다. 손 선생님이 다방에서 들려주던 이야기가 있다. 한 분야 정상에 오르면 모든 분야와 통한다는 것이다. 청와대에 대한체육회 대표로 초청돼 갔다. 정계 재계 예술계 각 분야의 정상이 원탁에 같이 둘러앉게 되더라는 것이다. 나는 대왕 참나무 앞에서 어르신들에게 흑백사진을 내보인다. 대학 시절 학교로 보내준 손 선생님의 올림픽 골인 장면이다.

손기정 선생님의 영화 ‘1947 보스턴’을 보러 갔다. 영화를 보면서 또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30살에 다니던 한국수자원공사를 그만두고 코흘리개 두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아내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멀쩡하신 생모가 중풍으로 돌아가시자 충격에 한의학 공부를 위해 서해를 건넜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대회 감독으로 손기정 선생님은 서윤복 선수를 출전시킨다. 서 선수가 2위에서 1위로 올라선 순간, 죽을힘을 내게 한 것은 병상의 어머니 모습이었다. 나의 인생 코스 길목에 계셨던 어머니와 손기정 선생님이 마의 언덕을 넘게 한 어머니도 함께 오버랩 된다.

대왕참나무를 쳐다보던 치유의 숲 어르신들 장면이 지나간다. 산림치유지도사로서 어르신들의 회복 탄력과 자아통합감에 대왕참나무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개울 물소리와 함께 한결 가벼워진 어르신들의 발걸음과 밝아진 얼굴을 보았다. 나름 각자의 정상을 향해 인생 골인 지점을 향해 달린 분들이다. 헤어지면서 손사래로 만류했지만 손가방에서 음료수병을 손에 꼭 쥐어준다. 정상을 정복한 또 다른 선수들이 치유의 숲 문을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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