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해는 짧아서 더 따스하게 느껴진다. 아파트 후문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산책길로 접어든다. 재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하천을 따라 산책길이 조성되었고 그 길은 산으로 이어진다. 곳곳에 운동기구도 있고 벚나무와 남천과 영산홍이 줄지어 계절을 선사한다. 덱길이 한참 이어지다 곧 시멘트 길이다. 산 입구에 다다르면 또 나무 계단의 연속이다. 산으로 이어지는 길에 흙을 밟을 수 있는 길은 없다. 흙길 위에 야자 매트를 깔아 놓았다. 미끄러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배려이리라. 산허리쯤 올라와 하천을 건너가면 또 아스팔트 넓은 길이다. 산의 7부 능선에 있는 절까지 차들이 가파른 길을 쌩쌩 오른다. 나도 집을 나와 여기까지 운동화에 흙 한번 묻히지 않고 걸어 왔다. 내 삶도 누군가가 만든 길 덕분에 오늘 여기까지 잘 왔다.

시멘트길, 혹은 보도블록이 깔린 길은 도시의 상징이다. 비나 눈이 와도 질척거리지 않아서 좋다. 차의 길, 사람의 길을 구분해 두어 좋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차의 길도 사람의 길이다.

‘갈래 길 나라 곳곳 어디든 새 이름표/가보지 않은 곳도/불러보면 정겹다/길 따라 눈먼 바람도 딸네 집 찾아온다//금샘로 낙조 삼길 달맞이길 꽃바위길/길마다 이야기/술렁술렁 부푸는 동네/그곳에 사는 사람들 둥글게 떠오른다//이정표 통하는 길 트인 길 이어진 길/덤불 속도 새들만이/날 수 있는 길 있듯/세상의 꽉 막힌 도로 풀어질 순환로’(김임순의 시조 ‘도로명주소’ 전문)

많은 길이 새로운 이름을 얻었고 가보지 않은 길도 그 이름만으로도 그려진다. 앞으로도 사람을 위한 길들이 새로운 이름을 달고 많이 생겨날 것이다. 우린 빨리 가기 위해 땅 위로도, 땅속으로도, 심지어는 바다 위로도 자꾸 길을 늘린다.

땅속은 나무의 길이다. 나무는 뿌리를 뻗어 그들의 길을 만든다. 광케이블, 가스관, 수도관 등을 묻어 나무의 길을 침해하는 것은 아닐까? 새들의 길에 비행기를 날리고 물고기의 길에 콘크리트 기둥을 박아 그들의 길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아파트 입구에 역이 생겼다. 화단을 만들고 사람이 다니는 길을 내었는데 조금 빨리 가기 위해 화단을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잔디는 죽고 새로운 길이 생겼다. 사람들이 편리를 위해 새로운 길을 낸 것이다. 급기야 그곳에 ‘여긴 길이 아닙니다’라는 팻말이 놓이고 못 들어가게 줄이 쳐졌다. 그 길은 다시 사람의 길이 아닌 나무들의 길이 되었다.

길이 자꾸 생기면서 흙길은 자취를 감추었다. 도시는 물론이거니와 시골에도 마을로 가는 고샅길이 거의 시멘트로 포장되었다. 마치 사람이 다니는 길은 시멘트 길이어야 하는 것처럼. 트랙터가 다니는 농로와 밭과 논 외에는 시골에서도 흙을 만지고 밟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아파트 놀이터에도 흙이 없다. 놀이 기구 아래에 있던 모래가 치워지고 고무매트가 깔렸다. 모래를 잔뜩 묻혀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고, 또 안전하다는 이유로 어른들은 반긴다. 한때는 학교 운동장에 인조잔디를 까는 것이 유행한 적도 있었다. 맨발로 흙을 밟고 걷는 사람들이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는 사람이 늘어난다. 우린 또 어싱길(Earthing road)을 만들고 있다. 갈맷길, 올레길, 해파랑길에 이어 황톳길이 생겨난다.

‘길이 새로 나면서 옛집도 길이 되었다/햇살 잘 들던 내 방으로 버스가 지나가고/채송화 붙어 피던 담 신호등이 기대 서있다//옛집에 살던 나도 덩달아 길이 되었다/내 뒤로 아이들은 자전거를 끌며 가고/시간도 그 뒤를 따라 힘찬 페달을 돌린다’ (강현덕의 시조 ‘길’ 전문)

감로수를 한 잔 마시고 이제 산에서 내려간다. 잘 만들어진 길 덕분에 그동안 앞만 보고 쌩쌩 달려왔다.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갈 것이지만 내 삶의 내려가는 길은 흙길이면 좋겠다. 딱딱한 시멘트 길이 아니라 좀 더 여유 있고 부드러워 내 몸무게도 거뜬히 받아주는 흙길이면 좋겠다. 진정한 숨결이 밴 흙길을 나무들의 이름을 찬찬히 부르며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