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국어대사전에서 ‘가치’의 뜻을 살펴보면 첫 번째는 ‘사물이 지니고 있는 쓸모’이며, 두 번째가 ‘대상이 인간과의 관계에 의해 지니게 되는 중요성’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첫 번째 뜻은 비교적 명확합니다. 그 대상이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어 그 쓰임이 크거나, 돈이나 다른 물품으로 바꿀 수 있는 객관적인 교환가치를 가졌느냐 하는 것이니, 자본주의에서 모든 인간과 사물이 평가받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반면 두 번째 뜻은 ‘관계’입니다. 보편적인 인간과 맺은 관계라면 첫 번째 뜻과 비슷할 수 있겠으나, 그 관계의 대상이 한 국가 또는 지역, 아니면 세대에 국한된 것이라면 그 가치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필자는 집에 잡동사니가 많습니다. 나에게는 그 물건들이 ‘나와 맺은 관계’로 인해 조선백자처럼 유리 상자에 넣어두고 보존하고 싶은 가치가 있습니다.

요즘 부산의 첫 번째 사립병원이었던 옛 백제병원의 1층 카페나, 커피도시 부산의 메카인 봉래동 창고군의 카페들, 그리고 와이어를 생산했던 공장을 문화공간으로 바꾼 F1963이 부산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창고는 부르는 게 값이 되었다 하고, 오래된 창고가 없으면 오래된 것처럼 꾸미자고도 합니다. 이에 한 문화기획자는 시멘트가 툭툭 떨어질 듯 어설프게 ‘시간’을 박제화한 카페 마케팅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건축학자로서, 그렇게 부산 시민과 맺은 ‘두 번째 가치’를 피력하며 보존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철거되고만 오래된 건축물들이 딱 10년만 버텼더라면, 카페와 문화공간이라는 보편적인 ‘첫 번째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생깁니다.

이런 생각하지도 못한 유행을 넓게는 ‘레트로 열풍’이라 부르기도 하고, 건축에서는 과거 산업혁명의 건축물과 오래된 기계를 풍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 또는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이런 공간이 갑자기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사랑받는 이유는, 그 현상은 얼핏 비슷해 보이더라도 국가의 문화와 시민의 문화적 취향이 다양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명료하게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일제에 의해 간접적으로 이식된 ‘산업혁명’이 왜 우리가 사랑하는 공간문화로 다시 소환된 것일까요.

‘21세기, 폐허에 탐닉하다’라는 신문 기고에서 건축평론가 박정현 박사는 “폐허 취향은 우리 시대의 기본 정조인 향수에 의해 촉발된다”면서 “가상현실과 디지털화의 속도에 비례해 집단 기억과 연결된 향수가 커진다”고 합니다. 눈이 핑핑 돌아가는 문명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이 도시 삶에서의 멀미를 가라앉히기 위해 스스로 마련한 공간일까요. 멀미는 내가 인지 가능한 속도보다 주변 속도가 빠른 불균형에 기인한 몸의 증상이니, 어쩌면 오래된 건축공간과 커피는 현대인의 멀미 치유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인간이 문명의 속도에 멀미를 일으킨 시기는 산업혁명기, 우리에게는 일제강점기에도 있었습니다. 백화점이 밤낮을 밝히고, 불꽃을 번쩍거리며 당시에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 전차가 혁명처럼 우리 삶을 지배하기 시작하던 시기입니다. 이때도 찰리 채플린은 기계를 조종하다 빨려 들어가는 인간의 모습으로 ‘모던타임즈’를 풍자했으며, 최초 댄디들은 문명 속도에 저항하듯 거북이에 줄을 매달고 느릿한 속도로 도시를 걷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속도는 상대적인가 봅니다. 사람들을 위압하던 높은 근대건축과 전차는 오히려 인간적인 풍경이 되어 ‘문명의 낯섦과 공포’에서 ‘인간의 속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수염마저 희끗해진 첫 번째 터미네이터가 인간의 친구가 되어서 새로운 문명의 적들과 싸우듯 말입니다. 커피 맛은 입속을 맴돌고 향은 공간을 채웁니다. 오늘은 커피 향이 은은히 물든 오래된 공간에서 그동안의 현기증과 멀미를 잠시 식히는 시간을 보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