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자동차가 생활필수품이 된 지는 오래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할 때 자동차 등록 대수는 2550만3000대다. 인구 1명당 보유 대수는 0.5대에 이른다. 이러니 이제 자동차 없이는 원활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자동차가 늘어나는 만큼 교통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도로교통공단 자료를 보면 지난 2021년 도로 위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20만3130건이며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26조9987억 원에 이른다. 또 사상자는 205만7919명으로 집계됐다. 평균 15초마다 1명이 죽거나 다친 셈이다.
차량으로 인한 비극은 어떤 이유로든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게 모든 이의 바람일 터다. 세상에 가슴 아프지 않은 교통사고는 없기 때문이다. ‘급발진 의심 사고’도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드는 것 가운데 하나다. 차량의 결함이 사고 원인으로 추정되는 까닭에 운전자로서는 제대로 손을 쓸 수가 없어서다. 운전 미숙이나 전후방 주시 의무 태만 등이 사고를 불러왔다면 당연히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멀쩡하던 자동차가 갑자기 제멋대로 움직였다면 그야말로 마른하늘에서 벼락을 맞은 꼴이 된다.
더 큰 문제는 급발진 의심 사고의 경우 제대로 된 원인 규명이 어렵다는 점이다. 현행법에는 ‘제조물 결함으로 인한 손해의 배상책임은 손해를 입은 피해자가 손해의 존재 및 손해액 규모 등을 입증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자동차 정보의 대부분은 제조업체가 갖고 있어 피해자가 급발진을 주장할 만한 자료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또 소송이 이뤄지더라도 제조업체가 자발적으로 관련 정보를 내놓지 않으면 차량 결함이라는 결론을 끌어낼 방법이 없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2010년~ 2022년에 급발진 의심 사고가 766건 발생했으나 차량 결함이 원인이라고 인정받은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치권과 지자체 등에서는 급발진 의심 사고에 대한 ‘정보의 불평등’ 해소를 요구한다. 운전자와 제조업체가 동등한 처지에서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가려내자는 논리다. 이와 관련해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 12일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의 입증 책임과 관련해 어떤 식으로든 개선이 돼야 한다는 사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 앞으로 규정 손질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특히 자동차는 고도의 기술력이 집적된 제조물이어서 피해자가 사고 원인을 파악하기가 어렵다며 이런 측면에서 입증 책임을 제조업체에 돌리는 방식으로 제도가 바꿔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와 비례해 정치권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허영 의원(춘천·철원·화천·양구갑)은 지난 11일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결함 및 손해의 증명 또는 손해액 산정에 꼭 필요한 경우 제조업체는 영업비밀이라고 하더라도 자료 제출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아울러 정당한 이유 없이 자료 제출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법원은 자료의 기재에 대한 상대방의 주장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고 결함 및 손해의 입증 책임을 제조업체가 지도록 규정했다.
더불어민주당 한준호 의원(고양시을)도 지난 18일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하면 원인을 의무적으로 조사하게 하는 한편 자동차 제작자가 사고에 관한 입증자료를 제출하도록 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대한민국시도의회의장협의회는 지난 4월 주무 부처 주도로 급발진 의심 사고 조사 및 체계적 관리를 위한 인력·조직·예산 확보, 차량 결함 입증 책임 제조사에 부여 등을 정부에 건의했다.
이 같은 여론을 수렴해 정부는 대응책 마련에 나선다는 방침을 세웠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최근 페이스북에 “여러 개의 급발진 의심 사고 영상을 보니 운전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며 “자동차 하자 때문에 발생한 사고라는 주장을 운전자가 입증해야만 하는 것이 과연 형평에 맞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글을 올렸다. 이어 “지금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논의되고 있는 만큼 최상의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덧붙였다.
일부에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자동차 제조업체에 증거 공개 요청권을 허용하게 되면 영업비밀과 관련된 자료 보호의 권리가 침해되거나 제도 남용으로 경영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이유다. 또 제조물 책임법 개정은 모든 산업에 적용되기 때문에 자동차 제조업 이외의 업체가 불의의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 급발진 의심 사고에 대한 책임 입증 공방은 그냥 피해 갈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정부와 정치권, 시민단체, 업체 등이 참가하는 공론화 작업을 통해 모두가 상생하는 최선의 방안이 빨리 나와야만 한다. 그래야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이 없어진다.
염창현 세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