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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의 시사탐방] ‘학생의 날’이 있다면

김용석 철학자

  • 김용석 철학자
  •  |   입력 : 2023-05-11 19:23:10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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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내가 대학에 재직할 때도 5월 15일 스승의 날에 학부 학생들은 옷깃에 카네이션 한 송이를 꽂아주거나 예쁜 카드를 전달해 주는 정도로 그날을 기념해 줬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학생들에게 다과를 대접했다. 스승의 날은 동시에 ‘제자의 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자 없는 스승이란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정도는 서로 부담 없이 사제의 정을 나누는 방식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스승의 날이 부담스러웠던 경우가 있었다. 정년퇴임하기 5년 전부터 대학원 강의를 많이 맡게 되었다. 대학원생 가운데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경제활동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대학원생들은 스승의 날 전후해서 교수들을 위한 회식 자리를 각별히 마련하곤 했다. 사제 간에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지만, 스승의 날이라고 대접받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관례’는 몇 년 계속되었고, 정년퇴임하던 학기에 홀연히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오전에 일반대학원 박사과정, 오후에 전문대학원 석사과정 강의가 있었던 목요일로 기억하는데, 수강생을 모두 합하면 30여 명 되었다. 강의 전날 집 근처 화원에 장미꽃 30여 송이를 개별 포장해 두라고 주문했다. 그러고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장미꽃 한 송이씩을 선물했다. “웬 일?”이라는 학생들에게 “내일이 스승의 날이니 오늘은 제자의 날”이라고 둘러댔다. 작지만 기대 밖의 선물을 모두 반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한 학생이 말했다. “교수님, 어쩜 요런 생각을 다 하셨어요!” 학교 스트레스는 물론, 직장 스트레스까지 싹 사라지는 기분이에요!” 중년 나이의 그 학생 말이 머리에 오래 머물렀다. 많이 힘들구나, 하는 생각에 짠했다.

학생으로 살아간다는 건 퍽 힘들다. 그건 직장과 학교를 겸해야 하는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모든 사람들, 배움의 길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학생의 삶’은 만만치 않다. 모든 배움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는 “바보는 배우는 것을 고통스러워한다”고 했는데, 이는 배움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한 말이지 현실을 반영하는 말은 아니다. 공자를 비롯한 동서양의 현인들은 배움이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지만, 배움을 즐기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선생은 항상 자신의 학생들 가운데 절반은 배우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서양 속담이 현실을 반영한다. 이런 계기로 나는 ‘학생의 날’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왔다. 어떤 사람은 스승의 날이 있으니, 제자의 날을 만들자고 한다. 하지만 스승과 제자라는 말은 너무 고풍스럽고 고전적 아우라에 싸여 있어서 현실적 학생의 삶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학생의 의미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이 세상에는 학생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에서 대학원생까지 공식 교육기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말고도, 수많은 학생이 있다. 사회에서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 전문 교육기관에 다니는 학생들도 있고, 평생교육을 받는 학생들도 있다. 학생의 날을 특별히 기려야 할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이다.

어떤 교육기관에서든 배움의 길이 어렵더라도 진정으로 학생을 위한 환경이 갖추어져 있으면, 학생의 삶은 덜 버거울 뿐만 아니라 의미 있고 재미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종종 이상을 배반하기 때문에, 어린이날을 둬 어린이의 삶을 특별히 상기하고 배려하는 것처럼 학생의 날을 둬 그들 삶의 의미와 고충을 되새길 기회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는 일찍이 “대학의 규율은 일반적으로 학생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생들의 이득을 위해, 아니 더 적절히 말하면, 가르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고안되었다”고 비판한 바 있다. 학생의 삶을 세세한 부분까지 성찰하고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지 않으면 나라가 부강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배움의 양상은 바뀌더라도 배움이 없는 인간의 삶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21세기의 문맹자는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배워야 할지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고 했다. 토플러에게 배움이란 배우고(learn), 이미 배운 것을 잊고(unlearn), 다시 배우는(relearn) 과정을 의미한다. 미래에 배움은 더욱 중요해지고, 학생은 여전히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학생의 날’이 있었다.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났던 광주항일학생운동을 기념하여, 1953년에 그 날짜로 제정된 바 있다. 70년대 유신정권 때 폐지되었다가 1984년 부활되었고 2006년부터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런 기념일도 큰 의미가 있지만, 포괄적으로 학생의 삶을 기리는 날이 있다면 좋겠다. 제안하면, 스승의 날을 학생의 날로 대체해도 좋을 것 같다. 선생도 계속 공부하고 배워야 하는 학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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