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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중세의 혐오와 공감의 정치

국민 파고든 혐오와 공포 달래고 치유하기는커녕

되레 조장하고 퍼뜨리는, 중세보다 못한 요즘 정치

정은정 부경역사연구소 연구원

  • 정은정 부경역사연구소 연구원
  •  |   입력 : 2023-05-10 19:24:13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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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증오·낙인찍기는 불특정 집단의 횡포이다. 중세 시절에도 혐오와 수치심은 대상에 대한 꺼림을 전제로, 분노와 증오의 부정적 감정을 비롯하여 생물학적·감각적·문화적·권력적 차원까지 두루 포괄한다. 중세 고려 당시의 혐오나 그 반대의 ‘길함’의 표현은 주로 동물을 통해 드러냈다. 지방사회를 끌어가던 향리층을 약삭빠르거나 우매함으로 그릴 때는 원숭이·쥐, 수탈을 드러낼 경우는 승냥이·늑대·이리로 묘사했다. 백성은 놀란 노루 따위에 빗대어 표현했다. 신분제적 질서로 운영되던 고려시대에 혐오와 금기는 지배력의 구심인 중앙보다 지방 향촌 사회에서 자주 언급됐다.

상서는 봉황·용·기린 같은 상상의 동물로 표현된다. 상서가 비치면 군주는 정상적으로 신료를 접하고 제사를 지낸다. 상서 동물의 출현 빈도는 곧 왕의 권위나 정치적 안정과도 직결된다. 상서 그림은 관인끼리 인맥 쌓기 뇌물용으로 거래됐다.

죽음·혐오·공포도 동물로 그려냈다. 복합재난과 예측하지 못한 죽음 앞에 중세 사람은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기층민이 느끼는 제일의 두려움은 먹고 사는 문제였다. 복합재난을 불러들이거나 무찌르는 상상의 동물은 육지에서는 요괴, 바다에서는 해수이다. 고려 궁궐의 건물 안팎을 지키는 문신(문배신)은 처용이다. 원래 처용은 신라 헌강왕 대 동해를 지키던 수호신이다. 동해 변방을 지키던 용신 처용은 국토의 서남해에 치우친 개경이 고려 수도로 정해지면서 서남해안의 용으로 둔갑한다.

바다에서는 기형 괴물이 해로를 지킨다. 인도의 악어·코끼리·물고기를 합성한 마갈어(Makara)의 등장과 확산은 중세 해상교역을 통한 문화교섭의 단면을 보여준다. 바다의 액난을 구제하는 마갈어는 인도에서 토착하다 동아시아 해상실크로드를 타고 마카라 장식문양이 돼 고려 청동거울에 새겨졌다. 용과 마주한 물고기 마갈어는 이종 결합된 요괴였다. 몸체의 각기 다른 부속물이 타 동물의 몸에 부착하는 변이는 재난이나 왕조 교체를 예견했다.

육지와 바다에서 인간의 두려움을 형상화한 요괴는 공포 속에서 안정감을 염원하던 집단심성이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이다. 요괴의 출현과 어두운 핏빛 색깔의 공포는 중세 동아시아에 모두 공유된다. 굉음과 날카로운 빛을 내뿜는 벼락·천둥은 경외 대상이 돼 신으로 섬겨졌다. 후대에 남아 출산을 기원하거나 벽사용 부적으로 벼락 맞은 돌도끼에 대한 기호도 컸다.

전염병을 막아내는 역신의 옷은 붉은색·검은색을 혼용해 쓰다가 녹색·파란색으로 바뀌어간다. 붉은색은 피, 검은색은 죽음, 녹색·파란색은 생명력과 바다를 상징한다. 중세 때 파란색의 통용은 당말 송대에 등장한 해양신 마조신앙의 유행과도 결부된다. 해상실크로드의 확장은 중국 동남해안 광주에서 발생한 마조신을 고려 해역에도 불러들였다.

혐오·공포에 맞서 중세 사람들 사이에 이를 막아내려 부적을 소지하는 관행도 있었다. 의종 대 닭 그림 부적을 써서 정적을 저주했다. 예종의 죽음을 조문하러 내왕한 송 사절단 서긍 일행은 험난한 해로의 안전을 기원하며 작은 배·용 문양· 불경 같은 다양한 부적을 바다에 던졌다. 무인집권세력과 중앙정부·민의 합작으로 조성된 팔만대장경이나 용주사탑에도 부적이 각인됐다. 부적 소지를 통한 구제는 무인집권기 전후 밀교의 영향이다.

무인집권 후반부터 연해안에는 향을 묻는 매향습속이 나타났다. 매향은 향나무를 바닷물이 유입되는 곳에 묻어두고 미륵하생을 발원하는 용화회에 공양할 향이나 약재를 마련하고자 한 신앙활동이다. 주도층은 다양하다. 지방관, 현지 방어를 맡은 수군지휘관·유향품관층·향도조직이 참여했다. 향나무 훈연을 매개로 신과 인간이 연락하고 악취를 정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매향 자체는 가장 먼저 출입구가 되는 바닷가부터 오염원을 차단하는 행위일 것이다.

그 무엇보다 중세 고려 사람에게 대표되는 두려움은 죽음과 직결된다.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은 오롯이 기층사회의 몫이다. 중세에 만연한 혐오 공포 금기를 수렴하고 통제하려는 노력은 국가 차원에서 착실히 시도됐다. 전염병을 방제하는 대책이 강구되고 도시정화도 추진됐다.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달래고자 해괴제를 치르거나 장례비용을 지급하고 또 방치된 몸을 본향에 돌려주었다. 중세에 기층에 만연한 혐오와 공포를 다스리는 태도는 비합리적이며 다분히 신앙에 기대는 수준이다.

혐오가 또 다른 혐오를 조장하고 있는 요즘이다. 혐오를 소거해야 할 정치인은 오히려 민을 편가르고 정치적 도구로 혐오를 재활용한다. 기층사회의 목소리는 정치무대에서 실종된 지 오래다. 중세의 사유체계가 지닌 한계는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기층민의 불안을 달래주고 치유하려는 교감 소통 공감의 정치력을 조금이라도 음미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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