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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우리의 엔니우스를 보내며

그리스문학 라틴어 번역, 로마시대 인문주의 개척

韓의 엔니우스 故천병희, 비극 전집 등 역작 알려

김진식 로마문학 박사·정암학당 연구원

  • 김진식 로마문학 박사·정암학당 연구원
  •  |   입력 : 2023-03-22 19:44:05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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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문명의 최고 번영기가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호라티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 문명을 바라보며 분노나 비애 없이, 담담하고 가볍게, 야만의 정복자 로마가 그리스 문명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말했다. 그리스 문명의 수용이 로마에게 풍요로운 축복이고 커다란 행운이 되었다는 로마 시인의 고백이다. 로마가 본격적으로 그리스 문명과 만난 것은 기원전 2세기 한니발 전쟁 이후였는데, 이 시기를 우리는 로마의 그리스화 시대라고 부른다. 그리스화 시대를 거치면서 로마는 그리스 문명, 문학과 철학을 수용했다. 로마는 그리스 서사시, 그리스 비극과 희극, 그리스 철학, 그리스 수사학을 200년에 걸쳐 수용했다. 그리스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번안했고, 그리스 문학을 모방하고 도전하는 가운데 로마는 그리스 문명의 정수에 닿았고 이를 스스로 체화했다.

그리하여 로마는 인문주의에 눈을 떴다.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무엇인지, 어떤 모습과 행동을 보여주어야 진정한 인간인지, 동료 시민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무엇이고 그들과 어떻게 화합해야 하는지 등의 물음으로부터 그리스인들은 인간교육의 이념과 목표를 찾아냈다. 이를 그들은 파이데이아(paideia), 인간교육이라고 불렀다. 이를 그리스 문명의 우등생 로마는 ‘인문주의(humanitas)’라고 번역했다. 인문주의의 스승 그리스를 착실히 본받은 학생 로마는 국가적으로 학교 교육을 정비하고 교과과정을 수립했다. 그리고 이를 로마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위세가 미치는 지중해 세계 전체에 제도화했다. 이때 그리스화 된 로마의, 로마화 된 그리스의 인문정신은 지중해 문명권의 굳건한 토대가 된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 로마 문명권이라고 부르는 세계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로마 인문주의의 개척자는 기원전 2세기의 로마 시인 엔니우스(Ennius)였다. 엔니우스에 의해 그리스의 수많은 문학 작품들이 번안 수용되었고 로마 문학의 전형이 그에 의해 만들어졌다. 엔니우스의 꿈에 나타난 호메로스는 엔니우스에게 그대가 바로 나의 환생이라고 말해주었다. 로마 시인이 제2의 호메로스라는 자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스 문명이 얼마나 강력하게 로마 문명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말해준다. 엔니우스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고 광범위하게 그리스 세계의 문학적 전범에 따른 인문주의로 로마 세계를 교육했다.

코로나19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역병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때마침 봄을 맞아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봄이 오기 직전 권위주의와 군사독재라는 야만의 시대를 굳건히 살아낸 천병희(1939~2022·단국대 명예교수·경남 고성 출생)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2022년 동짓날, 가장 길었던 밤의 어둠과 함께 그의 부고가 전해졌다. 그는 가히 헤라클레스의 위업을 이룬 사내였다. 밝아올 새로운 날들을 살아갈 사람들에게 문명 세계의 드넓은 지평을 열어주려고 평생 애쓴 스승이었다. 어두운 밤들을 지새우던 개척자는 우리에게 많은 서양 고전문헌 번역을 남기고 영면에 들었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메데이아,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엘렉트라, 아이아스, 일들과 날들, 신들의 계보, 아이네이스, 변신 이야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페르시아 원정기, 소크라테스의 변론, 파이돈, 크리톤, 향연, 고르기아스, 국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시학, 정치학,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갈리아 원정기,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로마의 축제들, 아리스토파네스, 메난드로스, 헤로도토스, 호라티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네카, 타키투스, 그리스 비극 33편 전체, 그리스 서사시 전체, 플라톤 전집은 우리의 엔니우스가 남긴 것들이다.

그리스 로마의 인문주의를 대표하는 서양 고전 문학 전체, 역사와 문학과 철학을 망라한 인문정신 전체를 우리는 천병희 선생의 노고와 집념 어린 번역 덕분에 비로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천병희 선생은 일본어 중역이나 기타 외국어 중역을 통해 우리가 접할 수밖에 없었던 1980년대에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직접 번역해냈다. 그는 서양 고전문학의 세계를 바로 그 세계를 이루는 언어의 우리말 번역으로 직접 우리가 읽을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더군다나 그는 진작 번역되었어야 할 거의 모든 것을 혼자의 힘으로 해내었다. 그것도 아마 상당 기간 그의 번역을 넘어서는 번역이 나오지 못할 정도의 수준으로 말이다. 이렇게 가벼운 시대에 그 많은 고전 문헌에서 그의 번역에 도전할 사람이 과연 나올 수 있을까? 이를 생각한다면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는 사람은 수천 년의 인문정신은 몰라도, 최소한 노학자가 평생 전하려 했던 인문정신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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