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풍자 의미가 어색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희화를 통해 사회를 성찰하고 통찰하자는 풍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한국인의 의식구조입니다. 그 기저에는 정이 있습니다. 단지 조소나 조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정신을 품고 있는 풍자가 닿는 지점은 공동체의 성장입니다. 그 과정을 이끌어가는 힘이 웃음이라는 장치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웃음이 귀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니 건강한 비판과 수용이 아쉬운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다양성 사회를 표방한 지 오래되었으나 다양성이라는 말이 겉도는 세계로 가는 듯합니다.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는 미래 언어를 만들어가지 못합니다. 엄숙함을 넘어 유연한 사고를 이끌어내는 웃음의 가치를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다시 찾아봅니다.
중세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끔찍한 독살에 의해 죽어 나간 수도사들에겐 공통점이 있는데 한결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 관련되었습니다. 누군가가 그 책을 읽는 것을 막기 위해 책의 오른쪽 아래에 독을 묻혔기 때문입니다. 한 장 한 장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책에 빠져들 즈음 독에 중독된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의문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수도사 윌리엄이 파견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 책을 깊숙이 감추었고 누구든 탐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독을 바른 사람은 다름 아닌 수도원의 실세 호르게였습니다. 사건의 전말을 파헤친 윌리엄과 호르게의 웃음 논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큽니다. 웃음이란 무엇인가. 웃음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지는 두 사람의 논쟁 부분을 일부 옮겨 봅니다. (윌리엄-윌/ 호르게 -호)
(윌)도대체 숱한 책 가운데 유독 이 책만 더욱 기를 쓰고 감추려 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세속적 희극에 관한 책이 많이 있고, 외설된 웃음을 찬양하는 다른 책도 얼마든지 있는데 당신은 왜 하필 이 책만 그토록 두려워하는 겁니까?
(호)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책이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철학자의 저서란 그리스도교가 여러 세기에 걸쳐 축적해 온 가르침의 일부를 파괴했습니다.…철학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이 세상의 모습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윌)그렇지만 웃음에 대한 논의는 왜 두려워합니까? 책을 없앤다고 해서 웃음 자체를 당신이 없앨 수는 없는 겁니다.
(호)그게 불가능한 일인 건 압니다만 웃음이란 우리 육체의 나약 타락 어리석음입니다.
웃음을 죽음이라 생각했던 엄숙주의 호르게와 달리 윌리엄이 주장한 희극적 유쾌함은 사회에 대한 관심과 환기입니다. 부조리한 상황과 사람에 대한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동시에 그것을 통해 나를 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웃음은 건강한 긴장을 주기도 합니다.
풍자는 신랄한 조소나 비난을 포함할 때도 있지만 그 기저에는 현실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생기 잃은 사회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직설적이되 엄숙한 비판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동반한 웃음 뒤에는 변화에 대한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자는 부족함을 비웃기보다 따뜻한 인간애로써 포섭해가고자 하는 화해의 구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탈춤을 통해 우리는 일찍이 웃음의 의미를 보았습니다. 엄격한 신분제에 대한 비판을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낸 탈춤에서 관객은 구경꾼이면서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는 것처럼. 보편적으로 누려야 할 인간의 권리를 유쾌한 언어로 통쾌하게 풀어내는 탈춤은 역동적인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주지 않던가요.
문득 1980년대를 가장 강렬한 메시지로 표현했던 오윤의 목판화를 생각합니다. 오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도깨비는 기득권의 권위를 이용해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비인권적 현장에서 비열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날립니다. 동시에 힘없는 민중의 편에 서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작품 속에 표출하고 싶었던 민(民)은 어린아이처럼 약하고 여린 풀처럼 부드럽지만 강인한 의지와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맺힌 사회에서 풀린 사회로 가기를 희망했던 오윤의 도깨비와 호랑이는 신명의 춤사위로 사회구조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합니다.
갈등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와 같습니다. 그러나 갈등이 생산적일 때 사회는 성장합니다. 내 편 아니면 적이 되는 당동벌이(黨同伐異) 말고 다르지만 화합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만들어가는 오늘을 만나고 싶습니다. 한바탕 신명으로 웃어보는 오늘을 만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