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감성터치] 이토록 죄스러운 바람

정재운 소설가

  • 정재운 소설가
  •  |   입력 : 2023-01-01 19:37:26
  •  |   본지 30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우리 집 아이는 해가 짧은 겨울이 싫다. 창밖에 내린 어둠을 인지하자마자 아이는 조바심이 났다. 주말 낀 성탄절 하루가 저물고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기 위해 되는대로 투정을 주워섬긴다. 아직 다 못 놀았는데, 왜 자기를 실은 차가 집으로 가고 있느냐고 따진다. 날로 눈치가 빨라진다. 엄마가 밉고, 타이르는 아빠는 만날 화를 낸다며 생사람을 잡는다. 자발적으로 다짐했던 산타 할아버지와의 맹세 따윈 오간 데 없다. 결정적으로 의지와 달리 왜 제 몸은 점점 잠기에 잡아먹히는지, 아이는 분통을 터뜨린다. 한두 번 되풀이되는 장면이 아니기에 룸미러로 아내를 흘깃 본다. 눈이 마주친다. 한 바퀴만 더 돌면 이내 완전히 잠들 거라는 무언의 확신을 주고받은 것이다. 아이는 그렇게 하루치의 어제를 쌓으며 내일로 나아간다.

아이를 키우면서 옛날을 헤적이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적치한 어제의 높이가 낮기도 하지만, 맞닥뜨리게 될 내일의 파고가 원체 높은 까닭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파도 무서운 줄 모르는 소년처럼 딸아이의 해변에서 조개를 줍는다. 미래와 대칭적 시간인 과거는 현재라는 찰나와 달리 매우 긴 시간이다. 과거는 이미 일어났기에 필연이며 확실하지만, 미래는 불확실한 가능의 영역이다. 글쓰기란, 현재라는 눈으로 광활한 과거를 들여다보고 특정한 기억을 더듬어 솎아내는 일이다. 그 노력더러 아이러니라는 가련한 진단을 붙인 까닭은 저 고정된 옛날도 현재라는 밀물에 의해 시시각각 훼손되며, 미래의 무게에 짓눌려 매몰되거나 흩어졌기 때문. 좁다란 이지(理智)의 영외지로 옮아가 무질서로 편입돼버린 그것을 주워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드물게 성공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여의치 않은 일이다.

세상의 모든 문학은 이 여의치 않은 시도 끝에 탄생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자전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첫 장에는 얼른 의미를 알 수 없는 종알거림이 눈에 들어온다. “오, 그 파얀 잔니꼬 피고….” 아버지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를 듣는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의 기억은 영아기에 가닿는다. 그 최초의 기억이 그이를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쳐 마침내 예술세계로의 비약으로 이끌 것이다. 작가는 한 예술가가 어떻게 재련되는지 보여주기 위해 에피파니 기법을 사용했다. 내게도 그이와 다름없이 흘러넘치는 옛날이 존재하는데, 거기 접속해볼라치면 매번 같은 곳에 닿는다.

안간힘을 다해 그려낸 회화 속에서 나는 외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다. 삼베로 짠 바지와 러닝셔츠차림인 내 입가엔 끈적한 수박물이 묻어있지만 닦을 생각도 않고 담방담방 수면에 잠겨있다. 볕은 나무그늘을 투과하지 못하지만, 날벌레까지 막아낼 리는 없다. 할머니의 부채질은 어떤 선풍기보다 일정하게 그것들을 흩어주고 있어 무엇도 나의 잠을 방해하진 못한다. 그 한갓진 풍경이 어느 해의 여름날인지 확신할 순 없지만, 나를 내려 보는 할머니의 얼굴에 내려앉은 비애를 미루어 그즈음이 적어도 내 아버지가 돌아간 후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최초의 기억에 접속하고자 하지만, 다섯 살 이전을 끄집어내는 데는 언제나 실패하고 마는 내 기준으로 마름질하면, 조이스의 저 유명한 도입부는 작가적 상상이 부려놓은 것이리라. 소설의 허구가 어떤 실체보다 진실을 선명하게 목격할 수 있음을 모르지 않지만, 까맣게 몰랐던 사람처럼 종종 억울해진다. 허구의 윤색으로도 조감되지 못하는 나의 더 오랜 옛날을 떠올리면 말이다. 내 딸아이도 언젠가 이즈음의 나처럼 최초의 기억에 접속하려 할 때, 접속 장애로 다섯 살 이전을 떠올릴 수 없으면 어찌할까. 이즈음의 저 말도 안 되는 투정들을 죄 잊어버리면 그 서운함은 어찌할까.

이 글을 쓰는 현재로부터 며칠 후면, 돌아간 아버지가 어린 아들과 보낸 시간보다 나는 딸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된다. 그렇게 또 새해를 맞는다. 무정한 자연물인 해를 보며 큰 소원을 품어본다. 아버지와 달리, 나는 남들 사는 만큼 살아 기억하지 못하는 딸아이의 옛날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비극이 올연한 세상에 이토록 죄스러운 바람이라니….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도시철 화명·수정역 사이 중간역 무산…용역비만 날렸다
  2. 2빚더미 회사에…돈 더 빌려줘 체불 해결하려는 능인선원
  3. 3수의계약 vs 경쟁입찰…북항 돔 부지매입 공방
  4. 4동남아 선정 미식여행지 부산 ‘금정산+온천’ 첫선
  5. 5부산대, 아시아대학평가 76위…韓 국립대 1위
  6. 6‘블루 웨이브’ 환호한 美증시, 퍼렇게 질린 韓증시(종합)
  7. 7시민공원서 버스킹 즐긴다…전용 공간 추진
  8. 8부산으로 이주하고, 먼 여행 떠나고…두 여자 그림이 달라졌다
  9. 9“한국 핵 잠수함·전작권 전환, 美 민주 승리로 제약 커질 듯”
  10. 10국내양식 향어 20여년간 간흡충 감염 ‘0’
  1. 1빚더미 회사에…돈 더 빌려줘 체불 해결하려는 능인선원
  2. 2김민석, 신천지 논란에 “죄송…조사결과 공개해도 문제”
  3. 3청해부대 임무, 호르무즈 650㎞ 앞까지 확대…해상초계기도 투입(종합)
  4. 4홍익표 정무수석 사의 표명…후임에 최인호 HUG 사장 거론
  5. 5회생인가 촉구 시민 목소리 1차분 6일 법원 제출
  6. 6[속보] 이 대통령 지지율 소폭 반등한 41%…민주36%·국힘 28%
  7. 7'조작기소 특검법' 오늘 與 주도 국회 본회의 처리 전망
  8. 8김민석, 신천지 논란 재차 사과…“상처 입은 모든 분께 죄송”
  9. 9곽규택 “산은, 대한항공이 통합 LCC 부산 설립 거부시 호반지원해야”
  10. 10신천지 의혹 역풍 휩싸인 김민석…계파갈등 격화(종합)
  1. 1동남아 선정 미식여행지 부산 ‘금정산+온천’ 첫선
  2. 2‘블루 웨이브’ 환호한 美증시, 퍼렇게 질린 韓증시(종합)
  3. 3국내양식 향어 20여년간 간흡충 감염 ‘0’
  4. 4팔란티어 AI와 함께 만든다…부산 신발업체 창신 ‘혁신 점프’
  5. 5비수도권 미분양 적체…LH 매입 신청 86% 탈락
  6. 6비에 화약 젖을라 손길 분주…400m 대형 불꽃 ‘카운트다운’
  7. 72005 APEC 이벤트서 대표축제로…100만 인파관리 ‘근육’ 키웠다
  8. 8수능날 증시 10시 개장…애프터마켓 오후 5~8시
  9. 9한 달 새 금융사 37곳 47만 건 해킹…털린 돈도 10억
  10. 10부산 외국인 관광객 400만시대 성큼... 카드소비 1조 돌파
  1. 1도시철 화명·수정역 사이 중간역 무산…용역비만 날렸다
  2. 2수의계약 vs 경쟁입찰…북항 돔 부지매입 공방
  3. 3부산대, 아시아대학평가 76위…韓 국립대 1위
  4. 4시민공원서 버스킹 즐긴다…전용 공간 추진
  5. 5금정구 제2체육센터, 중투심서 또 고배
  6. 6황령산 봉수대 영문 안내판 설치키로
  7. 7문 전 대통령 거제생가 복원, 진통 끝 시의회 통과
  8. 8오늘의 날씨- 2026년 11월 6일
  9. 9왼쪽 팔·다리 못 써 휠체어 의존…홀로 병마와 싸우는 60대
  10. 10[속보]혼자걷던 여성 5차례나 범죄대상 물색, 성폭행 혐의 30대 男 징역 4년 선고
  1. 1승부는 원점…‘홈런 공장’ 대구서 거포들의 전쟁
  2. 2페이즈 신들린 블로킹 9개…읏맨, 시작부터 웃었다
  3. 3태권도, 北 전통무술로 각인될라
  4. 4거인 4인방 APBC(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 첫 우승 이끈다…한동희·최준용 중책
  5. 5롯데 전설 故 최동원, 야구인 최초 ‘올해의 스포츠영웅’
  6. 6코르다, LPGA 올해의 선수상 조기 확정
  7. 7동의대 미식축구부 타이거볼 4강 진출
  8. 8레이예스 맑음…이이무라 흐림…‘로·비’ 안갯속
  9. 92027 아시안컵 내년 12월로 연기…차기 감독 선임 여유
  10. 10KLPGA 상금왕·대상 놓고 ‘림-솔(서교림·김민솔) 대전’
우리은행
주민자치 모범현장 가다
‘주민대표’가 건축 세부사항까지 의견…지방의회 심사 반영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학교 통폐합 지역 맞춤형으로 접근”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바흐를 찾아간 나, 한국을 꿈꾸는 그녀
세계유산위원회, 부산의 시간을 세계와 나누다
경제프리즘 [전체보기]
소비 아닌 문화 생산 주체 오페라하우스
한국 갯벌의 2단계 확대 등재 의미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코뿔소 없음과 진공
지역이 기획, 국가가 지원하는 R&D 시대 열자
국제칼럼 [전체보기]
국조 대상은 조희대가 아니라 증시 참사다
개·고양이 학대는 이제 그만
기고 [전체보기]
부산 관광 다음 키워드는 ‘건축관광’
‘성범죄 취업제한’의 사각지대
기자수첩 [전체보기]
금고 이사장 전횡, 지금도 진행중
엘리트 자평해온 市 공무원…생중계 회의서 능력 입증을
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전체보기]
세레나데, 다정한 위로
여름의 끝자락, 브람스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다대포에서 만난 퇴계 이황
세종시대 음악이 전해진 이유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탈서울’ 안 된다던 원안위, 세종행에 왜 침묵하나
AX·반도체 전시회 5개 동시에 열렸는데…
도청도설 [전체보기]
공공재
선출 권력 통제
독자 투고 [전체보기]
새로운 시작 ‘황혼 이혼’
무료 화장실 깨끗하게 쓰자
메디칼럼 [전체보기]
왜 제대로 비워지지 않는지 살펴야
개정 응급의료법이 ‘미수용 방지법’?
목지수의 도시브랜드 산책 [전체보기]
랜드마크 시스템의 시대
북항 돔구장에서 야구 보며 사우나를
박지욱의 뇌력이 매력 [전체보기]
건망증, 이렇게 잡자
운동으로 해마를 키우자
박진희의 컬처 픽 [전체보기]
‘부캉이’ 스펙터클에서 공존으로
부산 문화정책, 지금 필요한 선택
사설 [전체보기]
능인선원, 체불임금마저 대여금으로 처리하려 하다니
미 민주당 상·하원 장악…통상·안보 전략 재점검해야
세상읽기 [전체보기]
낯설고도 궁금했던 부산과의 첫 만남
일상으로의 초대
안재철의 연결하는 공간 [전체보기]
오래된 건축이 만드는 새로운 연결
지구와 도시의 연결을 묻다
엄길청의 문전성시 [전체보기]
말과 현실이 너무 다른 부산
반도체와 부산
이보성의 미술 현장 산책 [전체보기]
두 미술관, 각자의 역할을 묻다
시장이 강해진 것일까, 비엔날레가 약해진 것일까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복지의 ‘필요 원칙’과 포퓰리즘
보건의료에서 지방정부 역할과 ‘정책 의료’
이정구의 맛과 건강 [전체보기]
미식과 오래 씹기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기다림에도 비용이 든다
광복 81년, 다음은 바다의 산업 주권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대규모 대미 투자, 기회인가 위협인가
국제질서의 지각변동과 한국의 성장경로
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전체보기]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미분양의 경고, 지방 맞춤 ‘출구전략’ 서둘러야
주재민의 명당을 찾아서 [전체보기]
사람은 갔어도 명당은 남아 있다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정문도 묘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와인은 어떻게 마음에 남는가
추석의 식탁, 가족을 잇는 와인
특별기고 [전체보기]
‘해양수도 부산’ 토대부터 바로 놓아야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박자와 기보
국민악파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이대원의 ‘온정리 풍경’
유영국의 1957년 작 ‘사람’
CEO 칼럼 [전체보기]
십시일반(十匙一飯), 나눔이 만드는 연말의 온도
시민 주거안정에서 지역경제 활성화까지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