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세 들어 살던 서울 연희동 집에서 갑자기 나오게 되면서 귀향을 결심했고, 부산 기장에 원룸을 얻어 입주했다. 원룸을 얻을 때 예산 외에 따진 건 단 하나, 바다에 걸어서 갈 만한 위치에 있느냐였다. 기장읍에 거처를 정했다고 하자 지인들은 왜 하필 기장 촌구석이냐며 딱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조용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원룸에 입주한 다음 날부터 일광 바다로 산책을 다녔다. 매일 가고 싶었지만, 싫증 날까 봐 일주일에 두어 번만 갔다. 왕복에 걸리는 시간과 바닷가를 이리저리 거니는 시간을 합하면 한 시간 반 정도. 하루 산책으로 알맞춤했다. 바다 쪽으로 가지 않을 때는 기장읍을 돌아다녔다. 읍내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역전의 기장시장 길, 풍경의 호사로 기분이 낙락해지는 용소웰빙공원 길, 유년의 추억에 젖게 하는 담장 낮은 마을 길, 발밑 자갈의 자박거림이 듣기 좋은 일광산 테마임도 숲길이 내 산책길이 됐다.
개중 자주 찾은 곳이 아무래도 만만한 용소웰빙공원. 나는 공원으로 오르기 전 마을길을 빙빙 돌곤 했다. 묵직한 시간의 결이 드러나는 서부리 마을길은 예사로운 길이 아니었다. 이름하여 ‘기장옛길’. 기장읍성 동문에서 북문으로 올라갔다가 비스듬한 서벽을 따라 걸으면 남문과 해자 앞길로 내려와졌다. 거기서 기장시장통 길로 다시 동문 쪽으로 가서 용소공원으로 오르는 산책코스는 기장읍성을 주축으로 조성된 기장옛길의 중심지였다.
무심코 지나치던 팻말을 읽고서 아무것도 모르고 걸었던 길의 정체를 알고 나자 기장옛길과 기장읍성에 대해 급 관심과 애정이 생겼다. 옛길의 상징성과 더불어 기장읍성은 그 존재 자체가 자부심을 가질 만한 기장의 아이템(?)이었다. 촌구석에 거처를 정했다고 딱해하던 지인들에게 이걸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뭘 좀 알아야겠기에 자료를 뒤졌다. 기장옛길 조성사업과 궤를 같이해 관련 글이 제법 올라와 있었다.
기장옛길은 삼국시대부터 근대기까지 기장읍성에서 동래와 양산 울산 경주 방면으로 통하는 관로였고, 기장읍의 내륙 관문이었다. 이게 놀라운 건, 부산의 모든 옛길들이 동래읍성을 중심으로 뻗어나갔을 거라는 상식을 깼다는 점이다. 한 사례로 심노숭(沈魯崇·1762∼1837)은 부산 기장으로 귀양 와서 지내는 동안 ‘남천일록(南遷日錄)’을 남겼는데, 이 책에서 유배 여정의 시종점이 기장읍성임을 밝혀놓았다.
심노숭이 유배지 기장으로 오던 길과 유배에서 벗어나 서울로 돌아가던 길은 달랐다. 올 때는 파주 본가에서 출발해 서빙고 용인 영주 안동 경주 울산과 남창(울주군 온양읍 남창리)을 거쳐 기장으로 향했다. 1100리에 달하는 길이었다. 이 중 기장옛길 구간은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며 화철령을 거치고 장안천, 일광천을 건너 기장읍성 동문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심노숭은 기장현으로 온 지 5년 만인 1806년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는 지금의 용소웰빙공원에서 용소계곡을 타고 올라가 동래읍성으로 넘어간 뒤 양산 밀양 청도 선산 상주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는 영남대로로 서울길을 재촉했다. 용소계곡은 기장사람들이 기장 일광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을 동래장터에서 팔기 위해 머리에 임을 이고 넘나들었던 길이었다. 기장현에 부임해 임기를 끝내고 돌아가는 현감이나 군수들도 대부분 이 길을 걸어 기장을 떠났다.
그들처럼 나도 전세 기한을 다 채우면 기장을 떠나야 한다. 보물찾기하듯 기장옛길을 찾아 걷다가 내가 발견한 새로운 옛길의 관문, 기장역을 통해 떠날 것이다. 이사 박스 몇 개를 끌고 기장읍에 들어서던 첫날부터 기장역은 내게 어딘가로 뚫린 길의 관문이었다. 언제든 짐을 챙겨 나서면 모르는 세계로 뚫린 문이 읍성처럼, 오래된 미래의 표상처럼 역사(驛舍)로 서 있다는 것, 멋지고 설레는 일이다. 다가오는 새해, 옛 흔적이 남은 기장옛길이든, 미래의 표상으로 열린 길이든 걸음을 크게 떼보는 건 어떨까. 길이 펼쳐놓는 미래가 우리를 끝까지 실망시키는 법은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