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먹고 싶고, 하고 싶고, 가고 싶고, 보고 싶고, 갖고 싶고, 이 모든 ‘싶고’가 욕망이다. 욕망은 인간을 살게 하는 힘이다. 인간에게 기생하는 욕망은 성장하고 번식한다. 욕망이 주인이고 인간이 욕망의 숙주일지 모른다. 인간에게서 욕망을 빼고 나면 죽음이 남는다. 부정적인 함의로 쓰일 때가 많지만, 사실 욕망은 가치중립적이다. 가치중립에는 ‘지나치지 않다면’이라는 조건절이 달린다. 욕망이 지나치면 탐욕이 된다. 탐욕은 독이 되어 자신과 타인을 해친다. 지나친 욕망은 중독이나 파멸로 인간을 이끈다.
삶은 평등과 공평을 요구한다. 너무나 당연한 요구이지만, 인류 역사에 평등이 도입된 기간은 극히 짧다. 모두에게 한 장의 투표권이 부여되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지점에서 인간사회는 불평등하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 평등이 죽음이다. 모두가 죽는다. 그러나 이 죽음도 때로는 상대적이다. 빈부에 따라 먼저 찾아오고 늦게 찾아오는 순서의 조작이 이루어진다. 상시 죽음에 노출된 작업장에서 위험에 홀로 종사하던 청년의 죽음은 매우 불공평하다. 빵공장도 화력발전소도 죽음과 너무 가까웠다. 우리가 누리는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안락과 환하고 따뜻한 편리를 위해 누군가 홀로 죽음과 대결하고 있다. 의학의 진보에 따른 생명연장술의 혜택을 더 많이 받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본격적인 노령화 사회가 도래했다. 과학 발달은 죽음을 지연시키는데 공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문화시민이 아니어서 한 줄 서기를 모른다. 방문순서를 모른다. 삶이 오는 데는 장유유서가 있지만, 죽음이 오는 데는 장유유서가 없다. 언제 찾아와도 서프라이즈, 죽음은 예약되어 있지만 때와 장소를 알려주지 않는 황망한 약속이다. 느긋하게 백년을 기다리는 죽음도 있지만, 어떤 성급한 죽음은 서둘러 달려와서 느닷없이 자신의 지분을 요구한다. 어린 천사의 죽음은 직계존속을 비롯한 사람들을 비탄의 구렁텅이에 쑤셔 박는다. 너무 이른 죽음은 비통한 부모의 심장 아니고는 묻을 자리가 없다. 거대한 상실감의 구멍을 메울 방법이 없다.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완성되지 않는 애도, 불가능한 애도가 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따위 뭉툭한 위로는 무심한 선의로 가득한 언어폭력의 삽날이 되어 너덜너덜해진 부모의 심장을 다시 파헤친다.
죽음은 위험한 작업장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가장 즐거운 소풍과 가장 안전해 보이는 축제를 노린다. 방심의 허를 찌른다. 위험하리라고 상상도 하지 않은 일상의 거리가 가장 처참한 죽음의 난장이 되기도 한다. 느닷없는 역병 침범으로 인한 긴 봉쇄가 풀린 직후, 가벼운 놀이를 찾아 나선 대도시 골목에 죽음이 무더기로 기다리고 있었다니, 눈을 의심하고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미제레레 노비스(Miserere Nobis). 이 구절을 부를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아야 했다. 우리를, 인간을 불쌍히 여기소서. 차오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었다. 도나 노비스 파쳄(Dona Nobis Pacem). 뒤따라오는 구절을 간절하고 빠르게 끌어당겨야 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최근 몇 년처럼 인류 전체가 죽음 앞에서 위축된 적이 있을까. 각종 모임이 금지되고, 요양병원이 봉쇄되고, 학교와 국제공항이 폐쇄되었다. 자신이 내쉰 이산화탄소를 다시 들이마시며 땀을 뻘뻘 흘리며 마스크를 쓴 것도, 비대면과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며 시도 때도 없이 하달되는 질병관리본부의 명령에 따른 것도, 백신의 주삿바늘에 어깨를 내놓은 것도 모두 죽음을 피하고 싶어서다. 그렇게 피했음에도 결국 찾아온 죽음에 저항할 수 없는 육체는 얼마나 허약한가.
살아있음이 기적이다. 살아있음이 행운이다. 결국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 말처럼 시간 속에 던져진 존재, 인간은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홀로 있어도, 함께 있어도 찾아오고야 말 죽음을 기억한다. 죽은 사람이 살아보지 못한 시간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인 삶의 모든 환대에 감사한다. 사랑하는 그대, 충분히 욕망하고, 더 많이 기쁘고, 후회 없이 안녕하기를.
최정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