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감성터치] 겨자씨의 믿음과 슬픔

  • 국제신문
  •  |   입력 : 2022-11-27 19:50:23
  •  |   본지 22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그린 EM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지난 10월의 마지막 주말 밤, 3년여 만에 제대로 핼러윈을 즐기기 위해 도심의 한 골목으로 모여든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인파로 뒤엉킨 가파르고 좁은 골목에서 사고의 위험성을 직감한 여러 사람이 112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기민한 현장 대응은 없었습니다. 이상 없을 거라고 판단했던 걸까요. 몇 시간 후 그 골목에서 158명이 무참히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방으로 열린 도심의 한 복판에서 벌어진 사고였습니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고 현장의 참혹한 영상과 사진이 SNS를 통해 여과 없이 실시간으로 퍼져나가며 고인의 존엄과 부상자의 인격권을 침해했고, 무분별한 유포에 무방비로 노출된 많은 사람이 현장에 없었음에도 간접적인 집단 트라우마를 겪고 있습니다.

수잔 손택은 저서 ‘사진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이미지를 소모한다. 이미지는 현실을 소모시켜 버린다. 카메라는 일종의 약이자 병이며, 현실을 전유하고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는 수단이기도 하다’. 고발보다 우선하는 것은 고통받는 이들입니다. 기록보다 중요한 건 사람입니다. 그 밤에 찍힌 많은 사진 속에는 고통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렌즈 속에는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고 관음하려는 그릇된 욕망만이 이 담겨 있었을 뿐입니다. 이상 없음으로 여겼던 112상황실과 관계 없음으로 여겼던 일부의 목격자들 모두 이 비극의 방조자이며 가해자입니다. 304명의 죽음을 목도하지 않았지만 침몰하는 배 사진만으로도 상황의 참혹성을 체험한 기억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모자이크 처리 없는 사진과 숏폼 콘텐츠가 말해주는 진실은 없습니다.

겨자의 씨는 짙은 노란색으로 씨앗의 지름은 1~1.5㎜입니다. 머스터드 소스의 원재료이며 매운맛이 특징입니다. 겨자는 팔레스타인 북부, 갈릴리 지방에서 자생하는 십자화과 식물로 그 씨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서 지극히 작은 것의 대명사로 흔히 쓰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밤 겹겹으로 포개진 이들과 도움을 요청한 이들 모두 겨자씨보다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겨자씨의 믿음을 묵살한 건 국가였습니다.

고타미는 최초의 비구니입니다. 병으로 어린 아들을 잃은 고타미는 아들의 시신을 껴안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지만 살려낼 방도는 없었습니다. 석가는 살려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고타미는 석가에게 달려가 애원합니다. ‘한 번도 장례식을 치른 적이 없는 집에 가서 겨자씨를 얻어오라. 겨자씨 대여섯 알이면 아들을 살릴 수 있느니라’. 석가는 말했습니다. 고타미는 마을을 돌며 겨자씨를 구하려 했지만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겨자씨의 믿음과 슬픔을 생각합니다. 가만히 있으라, 이상 없음. 우리는 국가의 말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요. 국가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겨자씨만한 믿음조차 사라질까 두려운 요즘입니다. 스스로를 신사라 부르는 어느 정치인의 블로그에서는 적나라하고 참혹한 참사 사진이 정권투쟁의 도구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는 겨자씨를 구하러 나가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서너 관계만 넘어가도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겨자씨의 믿음과 슬픔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날의 비극 속에서도 저는 무람없이 점심을 먹었습니다. 사태를 직시하지 못했고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뒤늦게 깨닫습니다. 용서하지 마세요. 차마,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못하는 11월입니다.

강이라 소설가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가덕신공항 개발권 ‘반경 16.8㎞’ 가닥…54개 읍·면·동 혜택
  2. 2초록색 물든 광안리 앞바다
  3. 3尹 "우리 야당 부끄러웠다" 발언 논란 예고...의도는?
  4. 4매매가 10% 인하도 안 통했다…다대소각장 또 유찰
  5. 5부산교통공사 통상임금 항소심 “노동자에 총 268억 지급하라”
  6. 6전기료 지역 차등제 이르면 내년 하반기 시행
  7. 7“트럼프 체포됐다!”… 트럼프 기소 임박에 AI 가짜 이미지 확산
  8. 8'페이' 대전 시작...애플페이 맞서 삼성페이 제휴카드·교통기능 강화
  9. 9“백신 피해 심사서 의도적 왜곡 있었다” 역학조사관 폭로(종합)
  10. 10부산 첫 통합공공임대주택 공급…일광에 1134세대
  1. 1가덕신공항 개발권 ‘반경 16.8㎞’ 가닥…54개 읍·면·동 혜택
  2. 2尹 "우리 야당 부끄러웠다" 발언 논란 예고...의도는?
  3. 3檢 이재명 위례·대장동 등 관련 불구속 기소, 李 "법원서 진실 드러날 것"
  4. 4이번엔 日멍게 수입 논란, 대통령실 "멍게란 단어 없었다"
  5. 55000만원 예금보호 한도, 1억으로 올리나
  6. 6이재명 당직 유지...당헌 80조 예외 조항 적용키로
  7. 7[정가 백브리핑] 형도, 동생도 윤심에 구애…같은 길 걷는 與서씨형제
  8. 823분 대국민 여론전에도 격앙된 野 "용산 총독이냐" 국조·청문회 추진
  9. 9여론설득 나선 尹 “文정부 한일관계 방치”…野는 국조 추진(종합)
  10. 10의원수 확대 역풍…‘선거제 개편안’ 300석 유지로 손본다
  1. 1매매가 10% 인하도 안 통했다…다대소각장 또 유찰
  2. 2전기료 지역 차등제 이르면 내년 하반기 시행
  3. 3'페이' 대전 시작...애플페이 맞서 삼성페이 제휴카드·교통기능 강화
  4. 4부산 첫 통합공공임대주택 공급…일광에 1134세대
  5. 5청약통장 예치금 100조 무너져
  6. 6부산시, 대체거래소 유치 본격화…인가준비 법인에 타진
  7. 7부산시·지역 정치권, 산업은행 완전이전 해법 찾을까
  8. 8전국 공동주택 공시가격 18.61% 하락..."보유세 20% 이상 감소"
  9. 9애플페이 첫날 오전 17만 명 등록
  10. 10전력수급 불균형 정부도 공감대…수도권 반발 무마가 관건
  1. 1부산교통공사 통상임금 항소심 “노동자에 총 268억 지급하라”
  2. 2“백신 피해 심사서 의도적 왜곡 있었다” 역학조사관 폭로(종합)
  3. 32030세계박람회 유치 기원 담은 불꽃축제 열린다
  4. 4경남 한 고교서 선배 10명이 후배 1명 집단폭행
  5. 5[단독]"선글라스 찾아내라" 동사무소 직원 흉기로 위협한 60대 체포
  6. 6김해지능기계산단 국가산단 탈락 후유증… 김해시 오는 기업 마다할 판
  7. 7통상임금 소송 10년간 3건…만년 적자에 합의도 어려워
  8. 8檢 이재명 위례·대장동 등 관련 불구속 기소, 李 "법원서 진실 드러날 것"
  9. 9소방, 강서구 화학 공장 화재에 대응 1단계 발령
  10. 10오후 부산 울산 경남 봄비...기온은 당분간 평년 상회
  1. 1주전 다 내고도…롯데 시범경기 연패의 늪
  2. 2침묵하던 천재타자의 한방, 일본 결승 이끌다
  3. 3당당한 유럽파 오현규, 최전방 경쟁 불지폈다
  4. 4무한도전 김주형, 셰플러를 넘어라
  5. 5무승탈출 태극낭자, 이제는 연승 도전
  6. 6창단 첫 챔프전 BNK 썸 2차전도 패배
  7. 7공수 다 되는 김민재…“지금껏 이런 수비수는 없었다”
  8. 8좌완 부족한 롯데? 이태연을 주목해
  9. 91선발 스트레일리, 첫 등판은 ‘글쎄’
  10. 10삼세번 만에 ‘셔틀콕 여왕’ 안세영 시대 열렸다
우리은행
주민이 직접 설계하는 지방자치단체 구성
불신 큰 지방의회 권한 확대? 다수당 견제책 등 선결돼야
주민이 직접 설계하는 지방자치단체 구성
단체장 권한 집중 획일적 구조…행정전문관 등 대안 고민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황령산 봉수전망대에 보내는 간곡한 바람
더불어 살며 지켜가야 할 피란수도 부산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자연의 법, 인간의 법
낙동강 녹조를 그대로 둘 것인가
기고 [전체보기]
교육이라는 희망 사다리를 놓자
국제여객터미널 입주사 살린 후 임대료 징수를
기자수첩 [전체보기]
동계체전, 국내 최고 겨울 스포츠대회 맞나
학교 신축 공기지연, 노조 탓만 할 수 있나요?
김갑수의 생각 [전체보기]
한국은 여기까지다
안전하게 내려오는 방법
김석환의 이미 도착한 미래 [전체보기]
3차 세계화, 우리는 괜찮을까
‘죽어도 자이언츠’를 보면서
김용석의 시사탐방 [전체보기]
“거울아, 거울아!” 그 중독의 마법
선인장 가시와 ‘나의 불안전 불감증’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세계박람회 왜 부산인가?
문화자산을 물려받는다는 것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가덕신공항과 수도권 일극 체제
‘영웅 만들기’에 나서야 할 때
도청도설 [전체보기]
예금보호 한도 확대
‘놀토’ 대신 ‘놀금’
박상현의 끼니 [전체보기]
제주 구엄리 돌염전
아재들의 건승을 빕니다!
사설 [전체보기]
‘코로나 백신 피해자 심사 왜곡’ 정부가 규명하라
이재명 대장동 재판, 증거와 법리로 진실 가려야
세상읽기 [전체보기]
우리 곁의 ‘다음소희’
챗GPT, 친구인가 적인가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복지 지출의 원칙과 난방비 지원
의사 인력 확충의 올바른 방법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새로운 해양시대
이해인 수녀 '기도의 창가에서' [전체보기]
신발을 신으며 배우는 겸손
매화 앞에서, 슬픔 앞에서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한반도에 새로운 국제질서가 등장하고 있다
위태로운 중국의 미래
인문학 칼럼 [전체보기]
잃어버린 웃음을 찾아서
환대(hospitality)의 춤
장병윤의 대안 모색 [전체보기]
원전에 미래를 맡길 수 없다
다시 블랙리스트
전호환의 두잉세상 [전체보기]
근고지영
단석산 신선사의 목탁소리
차재원의 정치평설 [전체보기]
대통령의 초심
새해엔 선거개혁 위한 결단 기대한다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봄의 낭만에 대하여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특별기고 [전체보기]
한일관계, 기초 제대로 잡아가야
내 고향은 부산입니더!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오케스트라
노엘합창단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의재 허백련의 한국적인 산수화
이당 김은호의 ‘매란방’
CEO 칼럼 [전체보기]
재편된 마이스 시장에서 생존 전략은
ESG경영 골칫거리 해결한 시스템
  • 다이아몬드브릿지 걷기대회
  • 제11회바다식목일
  • 코마린청소년토론대회
  • 제3회코마린 어린이그림공모전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