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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저물녘에는

  • 국제신문
  •  |   입력 : 2022-11-22 19:01:02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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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속 모래를 떨어내다가 멈추었습니다. 11월도 중순을 넘어가고 있군요. 한 번쯤 물들어보지 않고는 떠나보낼 수도 없을 것 같은 달의 한가운데에서 사방을 둘러봅니다. 11월은 ‘옅어지는 저물녘의 빛’과 ‘가늘고 긴 그림자’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설렘과 쓸쓸함이 함께 하는 달입니다. 어둑해지는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듣는 기쁨도 함께합니다. 어디쯤에 서 있는지 걸어온 길과 남은 길을 가늠하는 시점이지요.

저물녘은 바람이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흔들립니다. 먼 곳에서 달려온 길들이 물든 나무들에 기대 편안하게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나뭇가지에 붙은 잎들이나 이미 바닥을 그득 채운 잎들은 정점을 찍었던 자신들의 색을 조금씩 지우고 있습니다. 붉은 것들은 붉은색을, 노란 것들은 노란색을 빼는 게 저들의 마지막 숙제인 듯합니다. 물들 때보다 더 짙은 결기로 저를 가볍게 말리고 있습니다. 이젠 더 이상 반짝거리지도 들뜨지도 말자고 서걱거리는 것들 속으로 걸어갑니다.

상류에서 날아와 하강하던 새 떼가 다시 빠르게 시야 바깥으로 빠져나갑니다. 환상인지 실재인지 순식간에 구도가 흔들리면서 잠깐 나도 휘청거립니다. 어떤 풍경이 되기까지 물이든 물집이든 동행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요. 색을 머금은 나무나 풀처럼, 걷거나 달리거나 주저앉아 있을 때마저 얼룩덜룩 물이 들며 뒤척거리지 않은 적 있을까요. 이제 우리 고요하게 구석구석 뜨겁거나 독하게 들었던 지난 계절의 물들을 빼내는 시각입니다.

저물고 있는 햇살 아래 서 있다가 가늘고 긴 그림자들을 만났을 때 반가움이 큽니다. 무거운 가방을 멘 사람이나 가벼운 가방을 멘 사람, 은발이나 흑발이 다 똑같은 그림자.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안 가는 팔다리, 잘 난 것도 못난 것도 없는 얼굴들. 그렇습니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따라가 봅니다. 마지막 상징마저 사라진 듯 바닥으로 희미하게 자라고 있는 그림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정겹습니다.

빛이라고 누구에게나 다 환하고 따뜻하지 않듯 그림자도 그렇습니다. 빛을 읽을 줄 알면 어둠도 읽을 줄 알고 당연히 그림자도 읽을 수 있겠지요. 보셔요. 사라지거나 저무는 것들은 모두 신비롭습니다. 그러고 보면 전혀 모르는 세상도 다 아는 세상도 없는 것 같습니다. 분별이 없어졌으니 어떤 기척에도 놀라거나 조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 낮은 언덕 아래로 천천히 자신을 흘리며 걸어가는 은발들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은근합니다.

사라진다는 말들은 아득하고 고요한 기운을 머금고 있습니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지우고 자신의 절정을 조금씩 바람 속으로 풀어낼 줄 압니다. 미련 없이 사라질 줄 안다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엇에든 스며들었다는 것 아니겠는지요. 이제 느긋할 때입니다. 어떤 것들에도 쉽게 연연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방향을 잡고 틀며 걸으면 됩니다. 희미한 그림자, 서로 닮은 그림자, 저물고 있는 것들은 이름이 없어도 형상이 없어도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득한지요.

끝물 가을날 아침, 낯선 번호와 함께 옛 동무의 이름이 뜹니다. 희미한 햇살과 긴 그림자와 사라지는 것들을 품은 사람들은 세상의 이쪽과 저쪽에서도 서로를 느낍니다. 없던 반세기가 수없이 생겼다 무너지고 우리의 웃음소리도 터져 쏟아집니다. “목소리가 똑 같노.” 몇 번씩 서로 그 말만 건네도 없던 빛과 그림자와 사라지는 것들이 생겨납니다. 11월, 저물녘입니다. 어딘가로 흘러가기 위해 강물은 저물녘 햇살에 반짝거리며 길들을 만드는군요.

강 건너 산 아래 줄 선 아파트에선 층층이 환합니다. 어떤 창은 지는 햇살과의 교감으로 불이 붙은 듯 붉게 반짝입니다. 멀리까지 부십니다. 하지만 곧 어두워지겠지요. 막바지 단풍이 떨어지고 긴 그림자가 더 길어지면서 생의 건널목마다 지켜준, 고마운 인연들을 생각합니다. 겨울이 문턱을 넘고 들이닥치기 전 아직은 내 발바닥이 후끈거릴 때 먼 벗들의 안부를 찾아 나섭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함께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권애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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