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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환의 두잉세상] 단석산 신선사의 목탁소리

  • 국제신문
  •  |   입력 : 2022-10-20 19:45:41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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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위해 시작한 등산이었다. 산의 맛에 빠져 전국의 100대 명산을 완등했다. 이제 200대 명산을 타고 있다. 산에는 스토리가 있고 역사가 살아 있다.

퇴계 이황은 도산서원이 있는 곳에서 낙동강을 따라 15㎞가량 떨어진 청량산을 6번이나 올랐다. ‘청량산인’으로 불리는 이유다. 산 입구에는 그가 지은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 독서는 등산과 같다)’ 시비가 있다. 바닥에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뎌야 정상에 도달하듯이, 높은 지식은 한두 권의 책으로 얻을 수 없다. 정상에 오르면 내려오듯이, 절정의 지식은 겸손과 비움으로 자신을 내려놓는다. 인생의 진리를 시(詩)로 풀었다.

경주 주변의 산에는 신라의 숨결이 있다. 남산은 신라 천 년의 역사를 담은 노천 박물관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토함산에 있다. 화랑들의 수련장이었던 단석산(827m)은 경주에서 가장 높다. 김유신은 17살 때 목검으로 수백 번 바위를 내리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김유신이 쪼개 두 조각난 바위는 정상에 있다. 단석산(斷石山)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단석산 곳곳에 문화재가 있다. 그중 국보 제199호인 마애불상군은 압권이다. 산 중턱에 ㄷ자 모양 거대한 석실(石室)의 암벽에 10구의 불상과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여래입상의 높이는 무려 8.2m나 된다. 동쪽 면에는 400여 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 ‘신선사(神仙寺)에 미륵석상 1구와 삼장보살 2구를 조각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8세기 말에 건립된 석굴암보다 150여 년 앞선 7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신선사는 마애불상군 바로 옆에 있다. 대웅전을 참배하고 주지 용담 스님과 차를 마셨다. 한참 대화를 이어가던 중 벽에 걸려있는 색 바랜 사진에 눈이 갔다.

스님과 꼭 빼닮은 사진의 인물은 독립투사 일봉 김대지 선생. 스님의 부친이었다. 1891년 밀양에서 태어난 일봉은 상해임시정부 초대 의정원의원이었다. 같은 밀양 출신으로 7살 아래 제자인 김원봉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인 일합사(一合社)를 만들어 항일운동을 했다. 1920년 상해로 건너가 신채호·박용만이 주도한 무력투쟁 노선에 가담했다. 이후 김원봉과 의열단을 창단했다.

1928년 길림성으로 옮겨 1943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만주를 무대로 항일투쟁을 주도했다. 일봉은 묘지 미확인 애국선열 66명 중의 한 명으로 하얼빈 동북쪽 벌판 어딘가에서 영면하고 있다. 같은 고향 출신 박선이와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차남 김명은 부친의 뒤를 이어 조선의용군 제3지대 창건을 주도하고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 해방 후 중국혁명에 가담했고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간부로 일했다. 1991년 그곳에서 고인이 되었다.

스님을 다시 찾았다. 스님의 본명은 김철은. 부친 김대지는 부인이 죽은 3년 뒤 1939년 경주 출신 조해선과 재혼했다. 그 이듬해 1940년 철은이 태어났고, 3년 후 1943년 부친은 돌아가셨다. 그토록 염원했던 대한민국의 독립은 2년 뒤에 찾아왔다. 1945년 초가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으로부터 “살아있다면 빨리 귀국하라”는 편지가 아버지 앞으로 왔다. 집을 지키고 있던 어머니는 6살인 철은을 데리고 한국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목마를 하고 두만강을 건너다가 그만 ‘김구의 편지’가 들어있던 보따리를 강물에 떠내려 보냈다. 모자의 신분을 확인해줄 편지가 없어졌다. 모자의 고난과 순례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어머니는 글을 몰랐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알아도 본명도 몰랐다고 한다. 당시 김대지는 일본 경찰을 피해 다니기 위해 가짜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서울 여러 곳을 찾아다녔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는 친정이 있는 경주로 내려가 가짜 호적을 만들어 철은을 학교에 다니게 했다. 결국 밥벌이가 없어 2학년을 마치고 어머니와 함께 단석산 신선사로 들어왔다. 올해 83세이니 70여 년의 세월을 신선사에서 보낸 것이다.

스님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가족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1980년대 말, 항일 전사인 둘째 형 김명이 연변에서 살고 있음을 알았다. 이후 한국에 살아있는 누나와 막내 형도 극적으로 만났다. 선친의 묘를 찾기 위해 2003년 중국 하얼빈으로 갔다. 묘지는 옥수수밭으로 변해 있었다. 주변 흙 한 줌을 가져와 신선사 옆 잠든 어머니(조해선) 곁에 묻었다. 자식으로 호적에 오르지 못했고, 보지도 못한 아버지를 매일 아침 목탁 소리로 만난다고 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김명의 딸 김주영(줄리아 리)은 ‘줄리아의 가족 순례기’를 2014년 출간했다. 할아버지 김대지가 출생한 1891년부터 아버지 김명이 돌아가신 1991년까지 100년의 기록이다. 항일 전사로서 중국에서 살아온 조선족 3대의 가슴 시린 순례기다. 끝나지 않은 우리 민족 질곡의 근현대사다.

보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르다. 산을 보는 사람과 오르는 사람이 있다. 산을 오르는 것은 독서와 같다고 했다. 산을 오르고 독서도 하고, 산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글로 쓰는 사람은 어떤가. 이런 인재를 키우는 것이 두잉(Do-ing) 교육이다.

전호환 동명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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