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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때로는 곰 같이, 때로는 여우 같이

한반도 지정학적 위험, 美中 갈등 등으로 커져

지도자 국제정세 파악, 절묘한 실리외교 펴야

  • 국제신문
  •  |   입력 : 2022-10-19 19:44:50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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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들 녀석이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다. 군대가 좋아졌다고들 하지만 나름 힘들었을 것이다. 건강하게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 고백하건대, 1990년대 초 내가 군에 입대했을 때 우리 아들 세대는 더 이상 의무적으로 군에 복무를 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순진했다. 젊은 시절의 낙관적인 태도와 점진적으로나마 진전을 보이던 남북관계의 개선이 그런 희망을 품게 한 것 같다. 분단체제가 얼마나 공고한 것인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이나 경험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반도의 분단은 종종 ‘지정학적 저주’로 묘사된다. 제국주의 시대와 냉전 시절 미국·일본·중국·러시아와 같은 강대국들이 대륙으로, 혹은 대양으로 진출할 때 한반도는 언제나 이들의 핵심적인 교두보 역할을 했다. 모든 국가 경제가 보편적인 국제 경제의 네트워크에 포함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21세기 초반에는 경제통합과 시장 동조화가 언뜻 대세인 듯 보였지만 미국의 견제에 따른 중국과의 디커플링, 그리고 시대착오적인 러시아의 침략 전쟁 등으로 인해 국제 정세는 당분간 ‘지정학적 저주’를 실감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요컨대, 강대국 간의 갈등과 충돌, 그리고 주변부의 전쟁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수수방관하기에는 우리가 당면하게 될 정치적·경제적·실존적 위험이 너무 커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고 대처할 것인가는 외교와 경제 전문가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의 몫이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곰 같은 여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이들이 자국민들에게는 곰처럼 우직하고 투명하되 외교에 있어서는 여우처럼 영민하고 교활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명토 박아 말하는 이유는 그동안 이들이 정반대로 행동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바깥 정세의 흐름과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국익에 가장 부합하는 조치를 때로는 신속하게, 때로는 절묘하게 취하는 것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이 살아남고 번성하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생존 기술이다. 그리고 이것은 복잡다단한 현대의 외교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문명이 시작되고 국가가 출현한 이래로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국가 간의 경쟁은 언제나 존재했고 고대인의 삶에서 크고 작은 전쟁은 상수였다.

오늘날의 시리아와 이라크 국경에 위치하는 텔 하리리(Tell Hariri)에는 한때 마리(Mari)라고 불리던 도시국가가 있었다. 이 도시는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에 의해 기원전 1759년경 초토화되었으며 1930년대 초반 프랑스 고고학 탐사팀에 의해 발견된 후 지속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마리에서는 지금까지 2만 5000점이 넘는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 이 중 ‘마리 서신’이라고 불리는 서신들이 유명하다. 이들 서신에는 왕이 주변국가에 파견한 세작들이 자신들이 담당한 도시국가의 동향을 시시각각 보고한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왕들이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적극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보 수집을 통한 정확한 상황파악은 생존과 번영의 필요조건이다.

1887년 이집트의 텔 엘-아마르나(Tell el-Amarna)라는 곳에서도 다수의 외교문서가 발견되었다. 기원전 14세기에 작성된 이들 문서는 이집트가 당시 어깨를 나란히 하던 히타이트·미탄니·바빌로니아·아시리아와 같은 강대국, 그리고 군소 보호국들과 주고받은 외교서신들인데 약소국의 왕들이 파라오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비굴하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하다. 일례로, 아무루(Amurru)라는 도시국가의 왕은 파라오에게, “저는 저의 군주, 왕의 발밑에 7번에 다시 7번을 엎드리나이다. 저는 파라오의 종이며 왕실의 개”이자 “발밑의 먼지”라고 스스로를 극한까지 낮춘다. 그러나 이것은 말뿐이었다. 노회한 전략가들이었던 이들은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도의 외교술을 발휘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며 살아남았다. 냉정하고 정확한 정세 판단이 생존과 번영의 필요조건이라면 유연하고 절묘한 외교술은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쌓아왔던 동맹에 대한 신뢰나 이들과 공유하는 기본적인 가치를 소홀히 하자는 말이 아니다. 흔히들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동맹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이 ‘곰 같은 여우’처럼 ‘밤 잔 원수 없고 날 샌 은인 없다’는 이 살벌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생존과 번영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의 묘를 발휘해주길 바랄 뿐이다. 청춘을 희생하며 오늘도 군에서 땀 흘리고 있는 우리 모두의 아들딸들을 위해서라도.

유성환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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