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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부산을 그리다

조선 이름 모를 화가의 회화 ‘동래부치도’처럼

부산 풍경 담긴 드로잉, 심장 두드리는 기록물

  • 국제신문
  •  |   입력 : 2022-10-12 19:11:57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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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말이었다. 나는 ‘부산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원도심 문화에 대해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들은 주로 부산 원도심을 그리는 ‘어반 스케치(Urban Sketch)’ 모임에 소속되어 있었다. 어반 스케치는 현장에 나가 직접 관찰하여 도시풍경을 그리는 것이다. 요즘 어반 스케치가 널리 유행하다 보니 지역별로 모임이 꾸려질 정도이다. 어느 도시 못지않게 부산 어반 스케처들의 열정도 뜨거웠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부산을 그리는 사람들은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거리로 펜과 종이를 들고 나갔다.

보름 정도 지난 뒤 내게 카톡으로 유튜브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 그날 불볕더위 속에서 그린 작품들로 만든 동영상이었다. 영상 속에는 40계단, 백산기념관, 보수동 책방골목, 자갈치회센터 등 잘 알려진 건물부터 오래된 주택의 벽면, 좁은 골목과 담벼락 등 어딘지 모를 마을 풍경까지 나타나 있었다. 내 강의 속에서 자칫 지나쳤던 미세한 부산의 풍경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부산을 그린다는 것은 부산을 한 걸음 더 들어가 이해하는 것이다. 눈에 포착된 사물을 세심히 관찰하고 그 상을 도화지 위에 반복적으로 옮기다 보면 깊숙한 곳까지 보기 때문이다. 어반 스케처스 선언문 중에는 ‘우리의 드로잉은 시간과 장소의 기록이다’는 조항이 있다. 그렇다. 부산을 스케치한 이 작품들도 사진과 영상, 문서 못지않은 훌륭한 기록물이었다. 그냥 기록물이라 하면 뭔가 서운하다. 화가의 마음과 정성이 담긴 따뜻한 기록물이라 할까. 필요 때문에 장소와 시간을 선정하여 바람처럼 찍은 사진에 비한다면 수많은 필흔(筆痕)과 고심이 담긴 그림은 보는 이의 심장을 두드리는 기록물이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부산을 그린 화가들도 꽤 많았다. 그림의 역사에 있어서도 중앙집권적 폐해는 심각하다. 조선시대 도화서에 속해 있거나 중앙의 유명한 화가들은 잘 알아도 지역에 살면서도 지역을 그린 화가에겐 관심을 주지 않는다. 조선시대 부산은 서울과 평양에 비교될 정도로 화가들이 왕성한 활동을 했던 도시였다. 부산박물관에서 오는 15일부터 ‘조선시대 부산의 화가들’이란 전시회를 개최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조선시대 부산의 화가들 가운데 변박 변지한 이시눌 김달황 등 잘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옥천 해옹 청풍주인 등 호만 남긴 무명의 화가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무던히 그림만 그렸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전시작품목록을 보던 중 나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기록화 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동래부치도(東萊府治圖)’였다.

‘동래부치도’는 동래부를 묘사한 회화식 지도이다. 이 그림은 ‘봉래수창록(蓬萊酬唱錄)’이란 서화첩에 포함되어 있었다. 1725년 동래부사 조석명은 여러 지인과 어울려 시문을 지은 뒤에 ‘동래부치도’를 넣어 ‘봉래수창록’을 제작했다. 이 그림은 실력이 뛰어난 화가가 그린 건 아니었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예전부터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이 무너진 뒤 1731년에서야 다시 성곽을 수축한 사실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다. 동래부사 정언섭이 동래성 복원 후 기념으로 세운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에서는 “동래는 임진년에 성이 함락된 후부터 140여 년 사이에 그 주변의 옛터가 무너져 백성들의 집이 되어 한 조각의 울타리를 친 설비도 없게 되었다”고 했다. 이 비문을 읽은 후 성곽이 사라진 동래, 백성들의 집으로 변한 동래부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동래부치도’를 보니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정말 성곽이 한 조각도 없는 동래부에 관청과 민가가 어우러져 하나의 마을이 된 것 같았다. 동래부 외곽은 논밭으로 꽉 차 있으며, 지금은 사라져버린 농주산과 삼성대도 잘 묘사되어 있었다. 이렇게 한 편의 그림은 어느 문장가가 쓴 글보다도 더 소중한 기록물이었다. 무너진 동래성 주위를 돌면서 관찰하고 한없이 붓질했을 ‘동래부치도’의 화가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실은 조선시대 부산의 화가 작품 중에 이런 기록화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산수화를 비롯한 호랑이 매 풍속 등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그렸다. 변박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동래부순절도’ ‘초량왜관도’ 등 여러 점의 기록화와 아울러 문인화 풍의 그림도 남겼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되는 ‘묵매도(墨梅圖)’가 그중 하나다. 그림 속에는 매화나무 굵은 줄기 위로 솟구친 가지가 아슬아슬하다. 절벽 같은 가지의 마디에서도 매화가 활짝 피어 있으니 그 기상을 어림짐작하게 한다. 상단의 화제에는 ‘눈 온 뒤의 찬 매화와 비 온 뒤의 산 경치는 구경하기 쉬우나 그림 그리긴 어렵다’는 글귀가 있다. 아, ‘구경하긴 쉬우나 그림 그리긴 어렵다’ 말이 심장을 두드린다. 부산을 그리려고 8월의 뙤약볕으로 나갔던 어반 스케쳐의 힘찬 모습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류승훈 부산시립박물관 전시운영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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