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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사랑이 아닙니다

  • 국제신문
  •  |   입력 : 2022-08-30 18:51:45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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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아침의 시골은 가족과 같다/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우리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다/원활하게 굽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나는 지금 간밤의 쓰디쓴 후각과 청각과 미각과 통각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어느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르나/차차 시골동리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뜨거워질 햇살이 산 위를 걸어내려온다/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우에서/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구별을 용서하지 않는/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김수영, ‘여름 아침’ 부분)

이른 아침에 ‘사랑의 변주곡’(창비,1990)을 읽었다. 백낙청 선생님이 김수영 시인의 사후 20여 년 지점에 엮은 시집으로 ‘여름 아침’은 1956년에 지은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당시 김수영 시인은 서울 마포구 구수동에서 밭농사를 지으며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셨다. 나는 시집을 덮고 밖으로 나갔다.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고물개질을 하’지는 않고 느긋이 여름 논밭을 바라보며 매지리 한적한 길을 걸어 산길로 접어들었다.

저만치 등산객으로 보이는 분이 소나무를 껴안고 있었다. 쓰려지려는 나무를 꽉 붙들고 있는 게 아니었다. 무분별한 벌목을 반대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가 뒤돌아서서 자신의 등을 나무에 부딪치고 다시 나무에 배치기한 후 나무를 안고 심호흡하길 반복했다. 나무에게, 자연에게 사랑을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는 피톤치드 뿜어내는 큰 나무를 안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밝은 기운을 얻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무에서 나오는 물질이 관절염 신경통 우울증 해소에 도움을 준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나는 헐떡거리며 오르막길을 걸어 그에게 갔다. “아저씨, 멈춰주세요. 말 못하는 나무가 얼마나 곤혹스럽겠어요. 그러다가 나무가 탈이 나면 어떡해요? 가뜩이나 며칠 내내 폭풍우 몰아쳐서 지반도 약해져 있는데.”

“이 여자 왜 이래, 아침부터 재수 없게!” 이런 말을 듣고 고개를 푹 꺾었다. 내가 오지랖을 부릴 때가 아니다. 나는 비참할 정도로 기진맥진하여 이곳 토지문화관에서 요양하다시피 하고 있다. 독일 국제시축제 행사 직후, 코로나19에 확진되어 베를린에서 열흘 넘게 격리되었다가 7월 중순에 귀국했다. 후유증인지 콜린성 피부염, 급성 바이러스성 장염까지 앓아 심신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상태다. 내 앞가림조차 못하며 문화관 밥만 축내는 듯하여 자책 중이다. 이곳 원주 토지문화관은 박경리 선생님이 건립하셨고 국내외 예술가들의 창작과 저술을 위해 집필 공간을 지원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이곳에 한 달 가까이 머물고 있는데 두문불출 글만 써도 모자라는 판국이다.

일요일에는 구내식당을 열지 않기 때문에 근처 막국수집에 갔다. 입주작가 몇 분이 국수를 기다리는 사이, 나는 식탁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흰 개를 쳐다보았다. 나보다 덩치가 큰 진돗개는 유순해 보였고 무척 사랑스러웠다. 나는 마당으로 나가는 그 개를 따라가 수돗가에 앉은 개의 흰 발등을 살짝 만졌다. 별안간 개가 내 팔목을 물었다. 내 비명을 듣고 사람들이 달려 나왔다. 벌써 식당 주인은 커다란 약통을 들고 있었다. 상처 부위를 소독액으로 씻어내고 세 가지 약을 발라주었다. 다행히 광견병 예방 접종을 한 개라고 했다.

“손님들 드나드는 식당에 개를 풀어놓으시면 어떡합니까!” 동행한 작가가 따지듯이 주인에게 말했다. 원래는 사람을 잘 따르며 아무도 문 적 없는 개였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개장수가 개를 몰래 잡아가서 깊은 산 나무에 매달아 놓은 걸 간신히 찾아내어 데려왔다고 했다. 그 사건 이후에 개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개가 먼저 무는 법은 없으나 누군가 만지기라도 하면 겁을 내며 방어한다고 했다.

물리기 전에 물어보았어야 했다. 사랑스럽다고 쓰다듬으면 안 된다.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개든, 나무처럼 가만히 있는 대상이든. 상대의 의견을 묻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끔 기다릴 줄도 모르면서 만지거나 기대거나 껴안는 건 사랑이 아니라 호기심 착취 폭력일 것이다.

김이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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