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점에 가면요, 어느새 저도 모르게 고쳐야 할 점들이 보입니다. 메뉴판이 깨끗한지, 주방에서 적당한 크기의 쓰레기통을 쓰는지, 알바생이 가위나 집게를 식탁이 아닌 접시 위에 올려두는지, 음식을 내어줄 때 ‘실례합니다’고 하는지, 식탁이 끈적끈적하지 않은지, 사장님이 매장을 지켜보는지, 손님이 자리에 없을 때만 수저통에 수저를 채워 넣는지, 손님에게 내어주는 양파와 마늘이 마르지 않았는지를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말한 것은 융통성 있게 넘어가도 됩니다. 특히, 외국에서 훨씬 위생이 안 좋은 길거리 음식도 저는 아무렇지 않게 먹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것은 ‘청결’이 아닙니다. ‘정성과 태도’를 보는 거죠. 사장님은 메뉴와 가격을 잘 알고 있어서, 메뉴판을 볼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메뉴판이 깔끔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장님이 손님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한다는 거죠.
주방에는 큰 쓰레기통을 놔둬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작은 쓰레기통이라면, 자주 갈아야 한다는 귀찮음을 견디겠다는 겁니다. 벌레가 꼬이지 않게 말입니다. 하나의 행동으로, 음식에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손님상의 가위와 집게를 식탁에 내려놓지 않고, 그릇에 놔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거지 그릇이 하나 더 생기는 일로, 효율성이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음식에 닿는 집기를 평소에 어떻게 관리하는지 느껴지게 하죠.
사실, ‘그냥’ 한다고 해서 우리의 건강에 문제없고요, 크게 불편할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는 가게’가 있습니다. 그 가게는 우리의 기억에 남게 되고요, 다시 찾아가게 하죠. 작은 차이가 만들어내는 결과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언급한 것들은 ‘저의 눈’에 보이는 디테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만 보이겠습니까. 사장님도 알 겁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름의 사정과 어쩔 수 없는 이유가 분명 존재할 겁니다. 사연 없는 무덤이 없고, 이유 없는 감옥신세는 없다고 했죠.
그러나 손님은 어쩔 수 없는 사정과 이유를 이해해주지 않습니다. 냉엄한 현실이라 외면하고 싶죠. 그러는 사이, 맛이 없거나 서비스가 좋지 않다고 해서, 손님은 사장님에게 “맛이 없어서 다음에 오지 않겠습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두 번 다시 안 갈 뿐이죠. 부정적 피드백이 없다고 해서, 마냥 잘하고 있는 게 아닌 겁니다. 배는 이미 기울어져 있을 수 있죠.
아니면, 생각하지도 못한 ‘모르는 영역’ 속에 있어, 사장님이 문제를 발견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대학교 은사님은 ‘unknown-unknow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는데요, 모르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코로나 사태처럼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기에, 당시에 우리는 어떤 대처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뉴스를 만드는 작은 스타트업을 운영하는데요, 직업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이니, 저 역시 비판의 목소리에 노출됩니다. 이럴 때마다 누군가 제 심장을 꺼내 꽉 쥐어짜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반발심이 오르고요, 잠시 후 스스로 자책하며 끝 모를 구렁텅이에 나를 던지기도 합니다. 저의 감정은 순식간에 이뤄진 상승과 하락의 반복 상태에 놓이죠.
그래서 주위에서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의 혹평에 100개의 혹평이 숨어 있다고 늘 생각하죠. 엄청난 압박이지만, 오판으로 질주하는 덤프트럭의 유일한 브레이크였으리라 생각하면요, 오히려 다행입니다. 그래서 저는 만나는 고객마다 ‘고칠 점’을 항상 얘기해달라고 하죠.
그래도 매일 두렵습니다. ‘맛이 없다’고 해줄 손님이 한 명 없어지거나,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일 가능성이 언제나 저를 긴장하게 만들죠. 힘들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스타트업에게 내일은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야 하는 거니까요.
이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남은 쉽게 보이지만, 나 스스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있다고 해도, 없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이제 내가 고쳐야 할 점을 스스로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 있는 고민의 출발선에 섰으니까요.
김동현 미스터동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