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밭에 내린 단비처럼, 고구마를 삼킨 듯 답답한 마음을 적시는 사이다’. 그런 느낌이다.
어제 부산에 모처럼 비가 내렸다. 연일 계속되는 찜통 더위만큼이나 복장 터지는 일이 많은 요즘, 반가운 단비였다.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실업률을 더한 경제고통지수가 21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서민의 삶이 고물가 탓에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이야기다. 이럴 때 훌륭한 리더십을 바라는 건 인지상정이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그러니 목이 멨고, 비가 위안이었다.
“나도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었다. 구불구불했지만 가장 좋고 빠르고 최적화된 길이었다.” 한국인이나 한국계 학자로는 처음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Fields Medal)을 수상한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겸 한국 고등과학원(KIAS) 석학교수가 지난 8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전한 귀국 소감이다. 39세 수학자의 성취는 수학계 뿐만 아니라 팍팍한 일상에 청량감을 주는 사이다 같은 낭보였다.
필즈상의 무게와 남다른 허 교수 이력에 관심이 쏠렸으나 정작 되짚어 생각해봐야 할 점은 우리 교육 현실이다.
1936년 수상자를 처음 배출한 필즈상은 국제수학연맹(IMU)이 4년마다 여는 국제수학자대회(ICM)에서 40세 미만 수학자에게 주는 상이다. 이 때문에 노벨상보다 받기 어려운 상으로 통한다. 허 교수는 지난 5일(현지시간) 핀란드 헬싱키 알토대학교에서 열린 국제수학자대회서 이 상을 받았다. 앞서 지난 2월 국제수학연맹은 한국을 최고 등급인 5등급으로 국가 등급을 상향 조정됐다. 수학 선진국이라는 공인이다. 한국으로선 겹경사를 맞은 셈이다.
허 교수는 1983년 교수인 부모가 유학하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부모와 함께 귀국한 그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를 거쳐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한국에서 마쳤다. 미국 국적이지만 토종 수학자로 불리는 이유다. 초등학교 땐 구구단에 어려움을 겪었고, 시인을 꿈꾸며 고교를 중퇴했다. 검정고시로 서울대에 입학한 그가 수학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필즈상 수상자인 일본 원로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이 만남에서 수학하는 즐거움을 깨달았고, 보통 수학자라면 평생 하나도 풀지 못할 수학계 난제를 11개나 해결할 만큼 뛰어난 늦깎이 수학자가 됐다. 이 때문에 그를 두고 ‘18세에 처음 테니스를 시작한 선수가 20세에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한 것과 같다’는 평가가 나온다.
허 교수는 필즈상을 받으면서 “수학은 편견과 한계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또 지난 6일 온라인 기자 간담회에선 동료에 대한 애정과 소통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마치 지난 3월 개봉한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 북한 출신 수학자로 고교 경비원인 이학성(최민식)이 수학을 어려워하는 고교생 한지우(김동휘)에게 원주율(π)을 피아노 연주로 깨닫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물론 허 교수는 우리의 수포자(수학 포기자)와 결이 다르다. 자신의 잠재력을 시험해 볼 여유가 있었고, 그걸 기다려주는 부모가 있었다. 그는 기자 간담회에서 “수포자라고 잘못 알려졌다”고 해명했다. 우리나라 고교생 세 명 중 한 명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스스로 수포자로 전락한다. 오직 대학 입시를 위해 암기과목처럼 반복하는 탓이다. 수학이 생각하는 힘을 기르며 미래를 이해하는 창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기성세대가 미래세대에 큰 죄를 짓고 있는 격이다.
어제 부산에 내린 비는 흡족한 정도는 아니었다. 허 교수 수상이 미치는 파장은 미지수다. 우리 교육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절실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16일 첫 국회 시정연설에서 제시한 연금 노동 교육 등 3대 개혁 과제의 실현이 그래서 중요하다. 3대 개혁 과제 중 교육 개혁은 천편일률적인 입시제도 개편과 대학 구조조정, 방만한 교육재정 운용 근절 등 현실적인 과제에 더해 미래 인재 양성이란 백년지대계에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그런데 뒤늦게 임명된 교육부 장관은 이제야 업무를 파악하는 중이다. 특히 국가 중장기 교육정책을 맡을 국가교육위원회가 오는 21일 출범한다. 대통령 소속 행정위원회로 업무·인사·예산의 독립성이 인정되며, 교육부를 비롯한 관계 부처와 시·도교육청, 자치단체는 사회적 합의를 거친 이 위원회 결정 사항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정권 교체 과정에서 준비가 덜 된 듯하다. 게다가 6·1 지방선거를 통해 새로 출범한 하윤수 부산 교육감호의 연착륙도 지켜봐야 한다.
허 교수는 올여름 한국에 머물며 수학계 발전에 힘을 보태겠다는 각오다. 13일 고등과학원에서 열리는 대중을 위한 수학 강연이 그 첫걸음이다. 허 교수의 행보가 꽉 막힌 교육 개혁의 물꼬가 되길 바란다.
정상도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