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37세 여자 환자가 외래를 방문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환자는 불안한 시선으로 진료실 바닥만 바라보았고, 동행한 복지시설 간호사의 옷자락을 내내 움켜쥐고 있었다. 몸은 성인이지만 저학년 초등학생 수준의 지능을 가진 발달장애인이었다. 이 아가씨의 심장은 선천성 기형으로 오랫동안 치료하지 않아 판막까지 망가지고 있었다. 심장수술을 권유했다. 하지만 환자의 어머니는 딸의 수술을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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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서상균 기자 |
심장을 고치면 정신(지적능력)이 좀 돌아오느냐? 지금 수술 안 해서 심장이 계속 나빠져 잘못되는 것과 수술 잘 돼 오랫동안 장애인으로 사는 것, 어느 쪽이 과연 ○○에게 행복하겠느냐? 혹시 몰라서 불임수술을 시켰는데 그때도 마취에서 깨고 회복하는 것이 힘들었다. 심장수술 후에는 잘 회복될 것인가? 쏟아내는 질문에는 오랫동안 발달장애 딸을 키워온 어머니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겼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어머니, 만약 저에게 ○○님 같은 딸이 있다면 저는 분명히 심장수술을 받게 할 겁니다.” 그 답변이 도움이 됐을까? 어머니는 어렵게 수술에 동의했고, 밀알심장재단에서 수술비도 지원해줬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행히 수술과 회복이 잘 마무리됐고, 마지막 외래 방문날에는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며 기뻐했다.
최근 부모가 발달장애 자녀를 숨지게 하고, 본인도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비정한 부모가 저지른 단순한 범죄일까? 전국장애인부모연대가 추산한 비슷한 사건은 최근 2년 동안 최소 20건 이상이다. 서울시와 서울시복지재단이 지난 4월 발표한 ‘고위험 장애인가족 지원방안 연구’에 따르면 장애인 돌봄자 374명 중 35%가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거나 시도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의 36.7%는 우울 불안 등 문제를 겪고 있다고 했다.
사랑스러운 나의 자녀가 점점 신체와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이 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기도 고통스럽다.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한 죄책감을 안은 부모는 조금이라도 자녀에게 도움이 된다면, 어떤 어려움과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치료와 교육에 매달린다. 특별교육과 돌봄을 제공하는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고, 그 내용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심지어 특수학급 내에서도 좀 더 장애가 심한 아이의 부모는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발달장애 아동은 갑자기 고집을 부리거나 돌출행동을 할 수도 있다. 어릴 때라면 힘으로라도 제어가 됐는데, 아이의 몸이 커지면서 그마저도 힘이 든다. 언제나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 없는 부모는 커피 한 잔을 여유 있게 마시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 악화된다. 아이가 성장하는 만큼 부모는 점점 약해진다. 혹여 자신이 없는 세상에 남겨질 아이 걱정에 가슴이 멘다. 발달장애인의 부모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심신이 모두 피폐해지는 일이다.
발달장애는 부모의 잘못도, 아이의 잘못도 절대 아니다. 사고나 질병처럼 작은 확률이지만 생길 수 있는 일이 내 가족에게 일어난 것이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도움없이 오롯이 그 무게를 장애인 가족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다. 최근의 불행한 사건은 분명히 또 발생할 것이고, 충분히 예상되는 결과를 방치하는 것은 ‘사회적 살인’이다. 복지가 부족한 사회가, 그것을 슬기롭게 배분하고 운영할 정부가 부모에게 흉기를 쥐어준 격이다. 발달장애인의 부모는 그저 자식이 건강하게 성장하기만 원할 뿐이다. 그저 좀 더 전문화된 프로그램, 교육 환경에서 아이가 교육받고, 작은 것이라도 제 손으로 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20대 발달장애 딸과 동반자살에 실패한 말기 암환자 어미에게 “죽은 딸에게 미안하지 않습니까?”라는 어느 기자의 추궁이 부끄럽다. ○○환자는 분명 절대로 원하지 않았을 불임수술을 받는 이 현실이 너무나도 부끄럽다.
한일용 부산백병원 흉부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