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변호사가 있었다. 나라 없는 시기 1930년대 산간벽촌서 태어나 고학으로 가난을 헤치고 지방대를 졸업했다. 언론인을 꿈꾸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관보 종사자’가 돼 사회적 병폐를 키우는 언론풍토를 보면서 그 길을 포기했다. 그 대신 취직 걱정 없다는 법조계에 들어가기 위해 고시공부를 시작했고, 1957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면서 검사가 됐다. 그러나 사람의 죄를 추궁하고 벌을 주는 일이 힘들어 5년 만에 검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가 됐다.
이후 남정현 작가의 ‘분지’ 필화 사건(1965)을 시작으로, 동백림 사건(1967), 통일혁명당 사건(1968), 김지하 ‘오적’ 필화 사건(1970), 민청학련 사건(1974), 인혁당재건위 사건(1974),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1980), 성고문 사건(1986), 임수경 방북 사건(1989) 등 고액 보수나 전관예우와 거리 먼, 그러나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시국사건의 변호인으로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도 두 번 영어의 몸이 돼 정보기관의 고문과 위협을 받았고 8년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해 가족에겐 한없는 ‘멍에’가 됐다. “어느 한 자리 포근한 여숙조차 없었던/우리의 가난한 하늘/어떻게 저 태양을 버리겠습니까?/어떻게 저 뜨거운 분노를 버리겠습니까?”(인간귀향), 그는 자신의 분노를 시로 승화하며 “하늘 끝까지 저 하늘 끝까지 나는 말없이 나의 길을 가련다. 하늘 높이 깃발 날리며 사나운 이 길을 가야겠다”(나의 길)는 삶의 의지를 갖고, 소통할 땐 촌철살인의 해학과 유머를 겸비한 ‘이중인격자’로, ‘야만의 시대’를 견뎌냈다.
‘민변’ 창립에 참여했고, 변호사의 직분은 인권보호라며 인권변호사로 불리는 것을 거부한 이분은 얼마 전 타계하신 한승헌 변호사이다. 사람들은 물었다. 모두가 궁핍하고 정치가 야만인 시절, 용기 있고 힘든 투쟁을 한평생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냐고. 그는 답했다. 안타깝고 애틋한 사연을 가진 사람을 ‘차마’ 외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때론 생명까지 포기하게 하는 이 ‘차마’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동일한 상황에서 역지사지를 통해 느끼는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아니었을까? 이 감정을 자본주의를 설계한 아담 스미스는 공감(sympathy)이라 하고 도덕가치의 원천으로 삼았다. 공감은 주관적 특성 때문에 적정성을 위배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하는 마음 내면의 ‘공정한 관찰자’(양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런 승인이 축적돼 사회의 도덕 일반원칙을 형성하고 인간의 마음에 이타심이 내재된다. 이것이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적극적인 행위이면 자비심(사랑)의 덕으로, 적어도 타인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소극적 행위이면 정의의 덕으로 규정했다.
이런 정의의 틀 안에서 이기심을 추구하는 행위는 신려(prudence)의 덕이 된다. 덕이 윤리적으로 잘 규율된 사회만이 개인의 이기심을 통해 공익을 창출할 수 있다. 이런 사회는 강자가 약자를 약탈하고, 모욕하고 차별하는 장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협동과 통합의 산물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공감은 나와 타인을 연결, 공존의 장을 확대하는 도덕적 원천이 된다.
한국은 이제 유엔이 인정한 선진국이 됐다. 세계는 정치 민주화, 경제 성장과 문화 역량 등에서 한국의 ‘기적’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면 참 기이하다. 합계출산율, 산업재해 사망자수, 남녀 임금격차, 자살률, 노인 빈곤율과 사회 양극화 등은 ‘선진국 클럽’인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고, 선진국 모두 가진 차별금지법은 15년째 국회에 계류 중이다.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국민 비율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는 점은 더 참담한 현실이다.
사회통합을 외치는 정치집단이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하고,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비문명적 불법시위로 규정하며 거침없이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한다. 반면 미래세대의 생존과 직결되는 기후와 생태문제엔 신기할 정도로 침묵한다. 공감이 사라지는 공간에 ‘제로섬의 이해타산’만 난무하고 선동·혐오로 갈라진 암울한 미래가 그려진다. 적어도 불평등을 허용하려면 롤스가 말한 가장 약자에게 합당한 범위에서 가장 많은 분배이익이 돌아가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왜? 우리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정치가 공감이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