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며칠 후 지기(知己)가 웹진에 글을 보내왔다. ‘대선 우울증-동물도 우울증에 걸린다’. 제목만 봐도 무슨 얘기인지 짐작이 되었다. 우울증도 병이니 훌훌 털어버리라는 말은 자신의 다짐이자 지기에게 건네는 위로일 터. 동병상련, 이심전심이다. 대학에서 셰익스피어를 가르치다 수년 전 퇴직한 교수님께 원고 건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요즘 “뉴스와 시사논평은 딱 끊고 대신 넷플릭스로 영화만 줄창 본다”고 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퇴행 우려로 답답해진 가슴은 영화로도 뚫리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물론 주변에서는 대선 이후 “‘대선’ 술맛이 좋아졌다”며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술잔을 드는 사람도 많다. 0.73% 차이라는 박빙승부 였기에 이들 두 부류의 장면은 더욱 또렷하게 대비된다. 정치권과 학계는 이번 대선에서 드러난 투표행태를 연구과제로 삼을 것 같다.
대선 보름 뒤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뉴스가 나왔다. 저소득·저학력 층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를 더 많이 찍었다는 투표 조사였다. 동아시아연구원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조사로, 이를 보도한 매일경제는 고소득·고학력 유권자가 진보정당을 지지하고 사회 서민층이 보수정당을 더 찍은 이른바 ‘계급배반투표’가 심화되면서 한국의 정치지형을 흔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월 200만 원 미만’ 계층에서 윤 후보를 찍었다는 응답자가 61.3%인데 비해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찍은 응답자는 31.9%에 불과했다. ‘월 200만~300만원 미만’에서도 윤 후보 57.2%, 이 후보 38.3%로 나타났다.
‘계급’은 계층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계급투표는 자신이 속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에 투표하는 것을 말하고, 계급배반투표는 자신과 다른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과 후보를 찍는 행위를 말한다. 전통적인 투표행태 연구에 따르면 투표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 세 가지는 정당(소속감)과 정책, 그리고 인물이다. 이들 요인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가진 유권자들은 합리적으로 계산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에 투표한다. 합리적 선택 이론이다.
계급배반투표는 합리적인 선택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왜 계급배반투표가 일어날까. 이를 설명하는 전통적인 정치학이론으로 지배이념론이 있다. 국가와 지배계급이 국가기구뿐만 아니라 학교와 언론을 동원해 노동자 농민 서민 등 피지배계급을 순치시킨다는 이론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민주화 이전 자유당 시절이나 군사정권 때에 딱 들어맞는다.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도 설명된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이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미국에서는 2004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존 케리가 공화당 후보이자 현직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에게 패하자 진보진영은 서민의 계급배반투표 원인 찾기에 골몰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것 중 ‘보수에 맞서는 진보의 성공전략’이란 부제가 달린 ‘프레임 전쟁’이 있다. 인지심리학자인 조지 레이코프(UC 버클리 언어학) 교수는 이익투표가 아닌 가치투표에 주목했다. 대중은 원래 합리적이지 않으며,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보다 공정·애국심 같은 가치에 더 끌린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그래서 선거캠페인은 정책을 설명하는 데 치중하기보다 가치를 프레임 해 여론을 선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레이코프의 ‘가치 프레임’은 정치커뮤니케이션 연구의 진전으로 평가받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주목받았다. 하지만 그의 이론이 이번 계급배반투표에 적용될 수 없는 결정적인 요인이 있다. 공론장(언론)의 기울기다. 레이코프의 ‘가치 프레임’은 언론을 통해 여론을 장악하기 위한 전술로 언론의 공정성을 전제로 한다. 정파적인 언론진영이 평평하지 않다면 가치 프레임의 보도는 일방적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쉽게 말해 한 캠프가 아무리 좋은 가치를 내세워도 다수인 반대정파의 언론이 이를 외면해버리면 그 가치는 유권자에게 어필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1년 국내 종이신문 열독률 조사에 따르면 보수성향의 조선 중앙 동아 매경 등 4개 신문이 전체의 70%가량을 차지했다. 진보성향으로 분류되는 한겨레 경향을 합친 열독률은 전체의 8.1%에 불과했다. 이들 종이신문의 기사는 대부분 포털을 통해 인터넷과 SNS에서도 소비된다. 방송환경의 비중도 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최근 들어 거대 레거시 미디어와 종편의 정파성을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미디어 선거 시대에 기울어진 운동장의 영향은 계량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하다.
저소득층 계급배반투표에 대한 의문의 답은 이 같은 기울어진 공론장에서도 찾을 수 있다. 군사정권 시절 국가와 지배층이 언론을 동원해 지배이념을 다졌다면 이젠 공룡언론이 스스로 권력이 되어 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일상생활에 바쁜 저소득층은 공룡언론의 프레임대로 세상에 대한 그림을 머릿속에 새기고 투표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더 옥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