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문화재단에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인터뷰어는 마지막 질문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구상하고 있던 작품에 대해 말하려던 내 입에서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이제 걷는 사람이 되려고요.” 쓰는 사람이 아니라 걷는 사람이 되겠다고 덧붙이며 나는 웃었다. ‘걷는 사람’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새벽, ‘이렇게 살다 간 죽겠구나’ 하는 유사 죽음을 경험한 뒤 ‘아이고 뜨거라’ 싶어 시작한 게 퇴근길 걷기였다. 불끈 결심한 그날부터 퇴사하는 날까지 도보 한 시간 반 거리를 걸어서 퇴근했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고 독립문공원을 돌아 비탈진 안산공원을 넘어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근처에 이르는 길은 몇 년을 걸어도 질리지 않았다. 탈것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걷는 모든 길이 그럴 것이다. 거래처를 다니며 받았던 모욕의 말들을 쪼개어 길바닥에 뿌리고, 내가 상대의 가슴에 무심히 던졌던 돌을 내던지고는 발로 밟아 부술 듯이 힘주어 걸었다. 걷는 동안 가쁜 숨과 땀으로 독기가 빠져나갔고, 날이 섰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날의 기분과 마음의 온도, 생각거리에 따라 길은 금세 접히거나 천천히 줄었다.

생각과 걸음과 길의 조화에 대해 레베카 솔닛은 “걷기를 통해서 우리는 생각에 완전히 빠지지 않으면서 생각할 수 있다”고 했다. 세계와 조응하는 사유의 리듬에 대한 말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길에 대한 단상과 철학은 계속 걷게 하는 힘이었다. 뿐인가. 온다 리쿠는 생각과 걸음과 길의 조화로 통과의례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온다 리쿠가 ‘밤의 피크닉’이라는 소설을 통해 그리고 있는 ‘보행제’는 아침 여덟 시부터 걷기 시작하여 다음 날 아침 여덟 시까지 학교에서 출발하여 학교로 돌아오는 행사이다. 보행제 초반에는 장난도 치고, 선생님 흉도 보고,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로 수다를 떨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말수는 줄어든다. 말이 줄면 생각이 영그는 법.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지나간다. 그러다 다리가 아프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아무 생각이 없어질 때쯤 함께 걷는 친구들과 속 깊은 대화를 시작한다. 반목하고 경계하던 두 주인공도 그러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상대에 대한 편견을 털어내고 화해에 이르게 된다.

요 몇 년 코로나 시국을 겪으면서 엄청난 생활의 변화가 일어났다. 재택근무를 하고, 온라인으로 회의하며, 휴일에도 배달앱으로 음식을 시켜 먹으면서 유튜브를 시청하거나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며 하루를 집 안에서 보낸다. 예전 같으면 히키코모리 아니냐는 눈총을 받았을 생활방식이 당연한 거리두기로 받아들여진다.

나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으나 매몰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본다. 사람을 직접 만나 온기를 나누고 소통하는 삶에서 멀어지면 미디어 세상에 갇히기 쉽다. 고도로 발달된 디지털 세계에는 없는 게 없다고 하지만, 세상의 실체를 느끼게 해주는 몸의 설렘이 없다. 무엇보다 지면이 밀어 올리는 압박감으로 내가 세계를 디디고 존재하는 실체적 존재임을 느끼게 해주는 길이 없다.

아, 지금 막 알았다. 내가 인터뷰어에게 쓰는 사람이 아니라 걷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한 이유가 뭔지. 앞으로의 계획을 묻기 직전에 인터뷰어는 ‘소설을 왜 쓰는가’ 물었고, 나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소설을 쓴다는 게 나한테, 그리고 이 세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평소의 자문자답에서 나는 늘 답을 찾지 못했고, 어디로든 튀고 싶었을 것이다.

보행제에 참여한 아이들이 탈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즈음 마음속 깊은 진심을 들여다보았듯, 나는 뭔가에 쫓기듯 소설을 쓰기 전에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게 절실한 지점에 와 있었던 거다. 세상의 낯선 순간을 대면하는 감각을 잃고서는 옷을 겹겹이 껴입고 숨어버린 내 마음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어설픈 답이 아니라 길이 필요했다. 나는 걷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내가 온전히 비어 길이 내 안으로 들어올 때, 내가 마침내 길이 될 때 걷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순간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