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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터치] 세상의 아버지 /김나현

  • 김나현 수필가·여행작가
  •  |   입력 : 2022-03-13 18:58:30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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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도 그리운 존재였던가. 어머니와 자식 사이보다는 대체로 덜 살가운 관계여서일까. 어머니 없는 세상만 천애고아 심정일 줄 알았다. 잊고 있다가도 돌아가신 아버지가 뭉근하게 그립다.

아버지는 꽃상여 타실 때까지 업보처럼 일만 하셨다. 여든에 영면하시고야 감자 심고 고추 심던 밭에 노곤한 육신을 뉘셨다. 어쩌면 상여 탄 시간이 고단한 이승에서 누린 가장 호강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신접살림을 나고도 큰집에 불려가 머슴처럼 일했다는 아버지는 아무래도 세상을 잘못 만났다. 유전자에 흐르는 예능의 끼도 애초에 흙 속에 묻었다. 올망졸망한 자식들 배 채우고 공부시키는 일이 오롯한 생의 목표였다. 자식들에게 예능 인자가 있다면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도시 골목에서 아버지 닮은 사람을 간혹 마주친다. 그들은 말끔한 차림과는 거리가 멀다. 남루한 작업복에 얼굴은 구릿빛이다. 광대뼈가 불거져 삶의 고단함이 내비친다. 살집 없는 얼굴엔 계단식 논두렁 같은 주름살이 골골이 졌다. 그들 생의 뒤안길인 듯. 생전 아버지 얼굴도 그랬다.

늘 비슷한 시간대에 한 손수레 노인을 마주친다. 골목을 출근길처럼 도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작달 막한 키에 바짓가랑이 걷어붙이고 종종걸음으로 손수레를 끌고 간다. 짐이라도 수북하게 실은 날엔 외면하지 못해 오르막길에서 슬쩍 밀어주기도 했다. 추운 겨울 어느 때부터인가, 이 노인이 보이지 않는다. 들리는 말로는 그의 아들이 알만한 병원 의사라던가. 구구절절한 남의 집 사정이야 알 수 없다. 수레를 끄는 삶이 지난했던 아버지 생을 보는 심정이라서일까. 그 안부가 궁금하다.

손마디에 옹이 앉고 손톱은 닳아 뭉툭해진, 농사꾼 아버지에게 예인의 기질이 있다는 걸 어른이 되고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 옛 기억을 되살려 보면 관련하여 몇 광경이 짚인다. 고향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이면 지신밟기를 했다. 남자들이 장구를 두드리고, 북과 징을 치며 집집을 돌아 지신을 밟았다. 동네 아이들이 그 무리를 따랐다. 그때 아버지는 꽹과리를 쳤다. 깨갱 깽 깽, 귀가 얼얼해지는 요란한 소리로 무리를 선도했다. 아버지는 꽹과리로 농악대를 이끈 상쇠였다.

마을 앞 공터에서 이따금 상여가 나갔다. 수십 년 이웃해 살던 이가 세상을 작별하는 날, 아버지는 이날도 한 역할을 맡았다. 장정 상여꾼들이 멘 꽃상여에 우뚝 올라타서 요령을 흔들며 앞소리를 매겼다. 북망산천을 들먹이는 아버지의 구슬픈 앞소리를 받아 상여꾼이 뒷소리 후렴구를 매겼다. 이 소리에 상여꾼은 발을 맞추고 마을을 벗어났다. 앞치마로 눈물을 찍어내는 아낙들 틈에서 담장 너머로 본, 연극 장면 같은 그림이다.

아버지는 생의 말년에 일탈 아닌 일탈을 벌였다. 고향에 간 딸에게 어머니가 들으란 듯 혼잣말했다. 말인즉슨, 네 아버지가 부지깽이도 농사일을 거든다는 농번기에 들일도 제쳐놓고 훠이훠이 읍내로 나간다는 것이다. 농기구도 일하던 논에 던져둔 채 옷 갈아입고 한량처럼 소리를 하러 간단다. 소리대회에서 받아온 상장까지 내놓는다. 이런 종이 쪼가리가 뭔 소용이냐고. 받아온 상장이 여러 장이다. 어머니 타박에 웬걸 흐뭇한 미소가 스멀스멀 피었다. 겉으로는 어머니 말에 동조하며 속으로 아버지를 응원했다. 뼈가 휘게 일하며 묻어온 끼를 소리로 다독이다니. 얼마나 짜릿한 일탈인가.

모든 아버지의 노고는 숭고하다. 어머니라는 말에 묻힌 아버지라는 이름을 새삼 음미해보는 요즘. 가족에 헌신하는 세상 아버지들의 말년이 행복하기를 소망한다.

아버지 기일이 다가온다. 묘소 앞 향나무가 얼마나 자랐을지. 꽃뱀 나오는 산자락에서 쑥도 뜯어야겠다. 편들어주는 딸에게 들려주던 아버지의 지루한 소리 한 대목 듣고 싶다. ‘청사~~안리~~~벽~계~~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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