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신을 만나러 통영에 가기로 했다. 곧 음력 2월 초 하루가 되기 때문이다. 이날 새벽하늘에서 바람신이 내려온다. 이 바람신을 영등할머니라고도 부르는데 한 해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이다. 풍신의 존재를 믿든 믿지 않든 ‘꽃샘’ 추위가 찾아오는 시기이기도 하다. 바람신은 20여 일 인간 세상에 머무는데 그동안 농사를 짓거나 바다에 나가야 하는 어부들은 풍신(風神)인 영등할머니가 섭섭하지 않도록 풍신제를 올렸다. 얼어 있던 땅이 녹기 시작할 무렵 부지런한 이들이 한 해의 풍요와 안녕을 위해 정성을 쏟는 일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바람신을 만나러 통영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지난 한 달 내내 마음이 무거워서였다. 물먹은 솜처럼 젖은 마음을 햇살에 말려도 보았으나 깊숙한 곳은 여전히 눅눅한 냄새가 났다. 이대로 썩지 않으려면 바닷바람도 쐬어야 할까? 생각이 들자 정화수를 길어내던 통영의 여인들이 생각났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이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충렬사 이르는 길 양켠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아지랑이가 감도는 봄날 핏빛 같은 꽃을 피운다. 그 길 연변에 명정골 우물이 부부처럼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음력 이월 풍신제를 올릴 무렵이면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

나는 음력 이월 풍신제를 올릴 무렵의 풍경 속으로 간절히 들어가고 싶었다. 정성을 다했을 풍신제를 준비하면서 동백 꽃길을 걸었을 여인들의 무리 속에 함께 있고 싶었다. 차가운 새벽, 정화수가 담긴 항아리를 이고 충렬사로 향하던 여인들의 몸짓을 상상했다. 붉은 동백꽃이 피어있는 길을 따라 가볍게 움직이는 치맛자락이 동백의 붉은 빛과 겹쳐졌다. 처음엔 답답한 마음에 바람신을 마중 가야겠다 싶었는데 통영에 도착하고 보니 나를 이끈 것은 소설 속에 등장한 동백꽃의 부름이었을까?

나는 통영에 도착하자마자 정화수를 길렀다는 명정샘부터 들렀다. 주택가와 도로를 낀 담장 아래에 위치한 이곳에는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충무공의 일화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나는 아무도 없는 우물가를 돌다가 상체를 기울여 물을 길어 올리는 상상을 한 뒤 소설속의 여인들처럼 천천히 충렬사 정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충렬사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반짝이는 녹색 잎과 탐스런 꽃이 가득한 동백나무부터 찾았다. 그러나 내 눈앞에 있는 실제 동백나무는 많이 힘들어 보였다. 400년이 넘은 아득한 나무의 나이 탓인지 최근 몇 년 전부터 꽃잎의 빛깔이 곱지 못했다고 한다. 향기도 없이 한겨울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초연하게 피어나던 동백꽃이 담담한 기품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17세기 중국의 작가 이어가 쓴 ‘한정우기’라는 책에는 동백꽃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소나무의 절개를 지니고 복사꽃과 자두꽃 같은 자태를 품은 채 춘하추동을 하루처럼 살아간다. 아마도 초목이면서 신선인가?”

신선처럼 살아가던 나무의 하루가 안타까워 보인 건 내가 지쳐있던 까닭일 것이다. 동백나무는 꽃잎 끝이 검게 변한 채라도 꽃을 맺으며 이맘때면 풍신제를 올리러 찾아들던 정성스런 새벽의 발걸음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바람신이 도착하려면 며칠 더 남았으나 마음으로 길어 올린 정화수 물 위에 꽃잎이 말라 떨어진 동백꽃을 띄워 기도해 보기로 했다. 바람신이 다녀간 분명한 증거라도 남기듯 한번은 매서운 꽃샘추위가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꽃은 어김없이 피어나듯이 과거와 현재, 상상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서 흔들리지 않는 내 마음을 찾았다.

봄꽃이라 하자면 참으로 많으나 가지에서 떨어져 땅 위에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동백꽃을 보거든 곱게 데려다가 물 위에 띄워보자. 그리고 고달픈 마음이 있다면 바람신에게 맡겨도 보자.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인생의 소용돌이가 일어날 때 마음을 모으고 귀를 기울여 보자. ‘당신만을 사랑합니다’는 동백의 꽃말이 위로처럼 들리고 그 곁을 지나던 영등할머니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