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 한 부분,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던 적이 있었다. 한평생 객지에서 독립을 위해 삶을 바쳤던 그가 바라던 국가의 상(像)이 ‘문화’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준다”는 말씀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들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바람대로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문화의 근원과 모범”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를 제3세계 국가로 생각했던 주변인 정체성이나 우리 문화를 전통문화로만 생각했던 문화에 관한 몰이해도 한몫했다. 그런데 2021년 현재의 시점에서 백범의 글을 다시 꺼내어 읽으니, 그의 소원이 갖는 예지력에 놀라고 동시에 감격스러워진다.

BTS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이고, 블랙핑크는 유튜브에서 가장 많은 조회수를 자랑한다. 코로나 시대 많은 세계인이 시청하는 넷플릭스에서 ‘오징어게임’과 ‘지옥’은 가장 많은 시청자 수를 기록했다. 작년 ‘기생충’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지난 9월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hallyu(한류)’ 등 한국어에서 온 26개의 단어를 선보였다. 한글은 세계인이 가장 배우고 싶은 언어가 되고, 한국은 가장 방문하고 싶은 국가가 되고 있다. 이쯤 되니 서구의 언론에서 K컬처를 분석하는 글이 쏟아진다. 변두리의 모방이 아닌 현대 문명의 ‘주연 배우’(백범의 표현대로라면)로 다루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한 세기 만에 변방의 후진국에서 세계의 중심국가로 탈바꿈한 사례가 있을까?

우리가 사는 위치를 지도에서 극동(far east)이라 불렀던 서구인은 역사적으로 우리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그들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왕국은 신라와 고려이다. 짧은 언급에서 신라는 금을 많이 생산하는 기후가 좋은 나라, 고려는 몽골제국의 속국 정도였다. 대항해 시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아시아 교역의 중요한 거점인 일본을 통해서 조선을 접했다. 그러던 중 1668년 출간된 하멜의 ‘표류기’는 서구인에게 조선에 대한 인식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화물감독관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이 당연히 정확할 수는 없었는데, 이 책을 계기로 ‘은자의 나라’ 및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뒤이어 형성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 유럽 열강은 조선의 해안을 탐사하고 내지를 여행하면서 관찰기록을 남겼다. 김학준 선생님의 ‘서양인들이 관찰한 후기 조선’에는 그들의 인식이 잘 정리되어 있다. 조선인은 게으르고, 조선은 지배계급의 탐학과 착취로 인해 곧 멸망할 것인데, 점령하여 재교육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양산되었다. 이 생각은 해방 후 신탁통치안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점차 조선에서의 경험세계가 넓어진 그들은 서양문명 우월주의나 백인 우월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선의 문화유산이 우수하고 가족의 연대감, 이웃 간의 상부상조 정신이 두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울러 구들장 난방기술 등 조선인은 부지런하고 두뇌가 명석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했다. 좋은 정부를 만나게 되면 정신적 자산이 이 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백범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밝히고 있다.

K컬처를 분석하는 해외 문화비평가들의 생각은 이러하다. 우선은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 이후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화정책을 거론한다. 아울러 새로운 기술과 보편적인 주제의 융합을 강조한다. 인터넷 기술이 구현하는 플랫폼이 기존의 서구가 주도하는 문화유통구조를 뛰어넘어 한국 문화컨텐츠를 세계인의 눈앞으로 불러왔다는 점이다. 원더걸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했던 노력을 BTS는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한국적’ 이야기, 즉 사랑 가족 타인에 대한 애정 등 사람 냄새가 물씬 나면서 악인과 의인이 만들어내는 서사구조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 서사의 주요한 특징은 ‘전투성’이다. 계층 간 사다리를 타오르는 사회적 이동과 그 좌절이 만들어내는 한국적 감수성이 팬데믹으로 고립된 세계인의 공감을 얻고 있다. 이는 백여 년 동안 식민지, 전쟁, 독재, 민주주의, 고속 경제성장 등을 겪으며 한국인의 문화양식에 응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해외 비평가들이 주목하는 점은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이다. 민주주의는 문화를 꽃피운다. 백범은 교육의 힘을 강조하셨는데, 민주주의와 교육은 분리될 수 없겠다.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