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강의실로 들어오시는군요. 캐리어 위에 불룩한 손가방까지 얹은 채 밝고 씩씩한 걸음입니다. 평소와는 다른 등장이네요. 수업을 마치면 어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날 것 같은 차림입니다. 체온을 측정해 출석부에 기록하는데 비닐백에 넣은 밀폐용기 하나를 책상 위로 들이밉니다. 동료들 책상 위에도 하나씩 얹어 놓습니다. 집에서 가장 큰 솥에 끓여온 호박죽이라며 선배들에게 돌리는 종강선물인 듯합니다.

가을학기에 합류하신 이분은 첫인사에서 그동안 자녀와 손자손녀들 다 잘 키워주었으니 이젠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 혼자 독립해 살고 있다 했습니다. 일흔 하나. 어쩌면 가장 홀가분한 시기일 것입니다. 이웃 도시에서 한 시간 이상 도시전철을 타고 환승까지 해가며 온다는 얘기에 감동해 모두 박수로 환영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찾아하는 분들의 열정은 대단합니다. 지나온 세월이 모두 엄청난 힘으로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늦은 나이에 젊은 학생들 속에 들어가 저도 공부를 했습니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수련의가 되면서 더 이상 학비가 들지 않게 되자 나 스스로에게 주는 상이라 생각하며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바쁜 와중에 매주 이틀을 빼 타지역으로 달려가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6시간 강의를 듣기 위해 왕복 7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나머지 5일은 또 학비를 벌기 위해 출강을 해야 했고요. 그때 가장 부러웠던 이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오가는 기차 안에서 책을 읽고 과제인 리포트를 쓰려고 하면 이 소설책 주인공과 저 소설책 주인공이 얽혀 서로 사랑을 하거나 싸우기도 하고, 이 시인의 시와 저 시인의 시가 뒤섞여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지정도서만 읽고 소화하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지요. 내가 좋아 시작한 것들이지만 너무 힘겨운 스케줄이었습니다. 주부 직장인 시인 학생, 어느 한 가지도 소홀할 수 없어 초인적인 힘으로 버텼던 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나이 들어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할 때는 어려움이 더 크게 따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음 세 가지만 가능하다면 머뭇거리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하라 권유합니다. 우선 건강입니다. 건강해야 무엇이든 해낼 수 있으니까요. 다음은 시간입니다. 여유가 좀 있어야 전념할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적든 많든 수업료가 들 테니 그 정도는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요. 이 세 가지만 충족되면 나이에 상관없이 무엇에든 도전하여 꿈을 실현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남성들은 정년퇴임을 하면 대개 시간이 많이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전업주부든 직장인이든 퇴직 후 노년이든 소소하게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친구나 후배들이 한동안 안 보이면 영락없이 출가한 자녀들의 아이 돌보미가 되어 있더군요. 끝도 없는 일의 멍에입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훌쩍 가버리고 겨우 일에서 벗어나 나는 누구인가 하고 노년을 들여다볼 때쯤 덜컥 병이란 게 발목을 잡고 그냥 두지 않기도 합니다.

오래전 가까운 지인들에게 아름다운 노후를 위해 무엇이든 준비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자녀들뿐만 아니라 언젠가 맞게 될 새 식구들을 생각하며,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요. 그 말을 듣고 원하던 공부로 자신의 꿈을 이룬 이도 있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애쓴 덕에 부를 이룬 이도 있고, 그저 놀러나 다니겠다고 허송세월을 한 이도 있습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결과는 놀랍게도 원한 대로 되어 있더군요.

도반들을 생각하며 새벽부터 쑤어 온 그분의 호박죽은 달고 부드럽고 깊었습니다. 걸어온 일생이 버무려진 듯, 남기고자 하는 얘기가 바로 이것이라는 듯. 온몸으로 시를 써오신 그분은 이미 따뜻한 시인입니다. 정해진 운명은 없다고 합니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원하는 결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르다고 합니다. 한해의 끝자락에 서서 안부를 묻습니다. 먼 당신, 지금 어디쯤 건너가고 계신지요.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