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면 정신을 잃게 마련이니 맨정신에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기도 한다. 젊은 시절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친구가 술을 흠뻑 마셨다. 너무 취해 집으로 갈 수가 없다. 같이 마시던 친구가 걱정이 되어 가까운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이끈다. 몸을 가눌 수가 없으니 가자는 대로 친구 집으로 갈 수밖에. 곯아떨어져 자다가 소변이 마려워 바닥에 달라붙은 몸을 겨우 떼 내어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문을 열고 시원하게 일을 보고 다시 잠자리로 돌아왔다. 동이 틀 무렵 친구 어머니가 아침밥을 지으려고 부엌에 갔다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 누가 냉장고에다!” 그 친구는 이후 그 집에 다시는 가지 못했다.
아마도 술과 관련된 이런 실수담은 누구나 한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음주로 인한 실수담의 결정판은 변영로(卞榮魯, 1897~1961)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이겠지만, 옛날 책을 보아도 꽤나 나온다. 오늘은 옛사람의 술주정에 대해 몇 마디 해 보자.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은 좌의정까지 지낸 인물로 숙종조 서인-노론의 핵심이었다. 숙종조는 당쟁이 절정을 이룬 시기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쫓겨났던 남인이 1689년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자, 미운털이 박힌 그는 평안도 벽동으로 귀양을 갔고 그곳에서 죽는다.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은 민정중의 동생이다. 민유중 역시 대단한 인물이다.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 권력이 있는 자리를 도맡아 했던 것은 물론이고 1681년에는 딸이 숙종과 결혼하자 국구(國舅)가 되었다. 이른바 인현왕후가 그의 딸이다. 이렇게 왕실 외척이 되었으니, 그 권세야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민정중 민유중 형제는 숙종 연간 권력의 절정에 있었고, 당쟁의 한 복판에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들의 음주(飮酒) 버릇이다. 민정중 민유중 형제는 함께 술을 마시다 흠뻑 취하면, 옷을 홀라당 벗고 거꾸로 누워 서로 발을 빨았고 그것을 두고 안주라고 불렀다는 것이 아닌가. 지체가 하늘처럼 높은 양반들이었지만, 술버릇만큼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괴이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은 민정중의 아들이고 인현왕후의 오빠다. 권세가의 자식이었으니, 출셋길을 달린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역시 좋다는 벼슬 두루 거쳐 우의정 좌의정까지 올랐고, 노론의 핵심으로 경종 영조대 정계를 이끌었다. 그런데 민진원은 집안의 권세를 대물림했을 뿐만 아니라 술버릇까지 이어받았으니, 술을 마신 뒤 술주정이 심한 것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어느 날 영조가 민진원에게 술을 하사했다. 왕이 술을 내렸으니 주는 대로 마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엎드려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영조가 옆에 있던 신하를 보고 물었다. “저 대신(大臣)이 어찌 오늘은 술주정을 하지 않느냐?” 평소 민진원의 술주정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술주정을 하지 않고 엎드려 있는 게 이상했던 것이다. 어떤 이가 민진원의 옷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오늘은 어째서 술주정을 하지 않는 게요?” 민진원이 잠시 얼굴을 들고 영조를 보더니 다시 엎드리며 말했다. “저 양반이 겁이 나서요.”
아무리 술주정이 버릇이라지만, 왕 앞에서 술주정을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허락 없이는 왕의 얼굴은 쳐다볼 수 없는 것이 법도다. 그런데 영조의 얼굴을 바라보고 “저 양반이 겁이 나서요”라고 했으니, 이 역시 술주정이되 ‘애교 있는’ 술주정이었던 것이다.
2년을 끌고 있는 코로나로 인해 몹시 지친다. 최근 나타난 새 변이 바이러스 오미크론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곧 연말인데 예년 같으면 송년회니 뭐니 하면서 직장동료와 가까운 벗들, 가족과 어울려 한때나마 즐거운 시간을 가지겠지만, 올해도 코로나로 인해 그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마냥 우울해할 수는 없기에 독자 여러분 한번 웃으시라고 옛사람의 술주정 이야기를 쓴 것이다.
모일 수 있는 사람의 한도 내에서 만나 한 잔들 하시고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 가지시기를 빈다. 물론 과한 술주정은 하지 마시기를! 굳이 하시려면 애교 있게 하시기를.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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