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동도 없이 한참 동안 풍경화 앞에 서 있던 한 중년 여성이 “혹시 작가가 사용하는 붓을 보여 줄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한국에 있는 작가에게 연락해 빨리 붓 사진을 보내 달라고 했다. 작가의 손때가 묻은 낡은 팔레트와 초라한 붓 네 자루를 보는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몇 십 년을 묵묵히 작가 자신의 지난한 인생을 오롯이 캔버스에 담은 이 작품은 이역만리 낯선 타국으로 건너와 비슷한 인생을 살아온 듯 보이는 한 아랍 여인의 심장을 후벼 파고 있었다. 아! 예술의 힘이란… 한 비평가로부터 ‘묘사를 허락하지 않는 풍경’이라는 찬사를 받은 부산 출신 염진욱 작가의 작품 ‘Memory of mountain’은 뜨거운 사막의 나라 아랍에미리트의 한국 미술로 남게 됐다.

아라비아반도 동부에 위치한 아랍에미리트는 우리에게는 부자나라 또는 만수르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문화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도시마다 다양한 문화시설과 행사를 경쟁적으로 유치하고 있으며 자국의 문화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수준 높은 한국 작가의 작품을 이곳에 선보이게 된 것은 미술관과 컬렉터들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엄청난 액수의 미술품을 구입하는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수도 아부다비는 사디야트 문화특구를 만들어 ‘루브르아부다비’를 유치했고 ‘구겐하임아부다비’와 ‘자예드국립미술관’도 건축 중이다. 그리고 ‘아부다비퍼포밍아트센터’와 문화공간 ‘웨어하우스421’, 뉴욕대학교 아부다비 분교의 ‘NYUAD갤러리’ 등이 수준 높은 공연과 전시로 문화 수준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아부다비아트’와 ‘아트두바이’도 세계적인 아트페어로 성장하고 있으며 한국의 주요 갤러리들도 참가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아랍에미리트뿐만 아니라 많은 중동 국가들은 문화산업의 저력, 즉 예술이 종교 언어 지역의 경계를 허물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통의 중심에 있으며 결과적으로 국가발전의 원동력임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한국 작가의 훌륭한 미술작품을 포함해 낯선 나라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공감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질적인 문화를 수용하고 조화롭게 수긍하려는 그들의 태도를 아부다비 루브르미술관에 전시된 이우환 작가의 작품 ‘조응(correspondence)’이 대변해 주는 듯하다.

매년 아부다비아트에 참가하기 위해 아랍에미리트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 있다. 하나는 우리나라의 훌륭한 미술작품을 해외에 소개하고 홍보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린다는 일에 대한 사명감과 자긍심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와 전혀 다른 생소한 문화에 사는 사람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하는 동시에, 문화는 서로 다르지만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삶과 정서에 공감하고 더욱 겸손해지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에는 그들이 살아온 삶이 그대로 묻어 있으며 작가의 삶 또한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 ‘에미라티’들은 우리 작가의 작품에서, 나는 아랍 작가의 작품에서 우리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미술작품이 주는 감동은 모든 것을 초월하며 이런 점에서 예술이 세상을 묶을 수 있는 큰 힘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먼 나라의 작가가 그린 작품 앞에서 그들이 사막에서 꿈꾸던 산에 대한 이미지를 기억하고 행복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사막의 아름다운 에미라티들과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게 된다.

다양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서로 다른 삶의 양식이 생겨났지만 어느 지역에 살더라도 삶의 본질은 달라질 수는 없다. 이것이 미술작품이 사는 지역을 초월해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이유다. 아랍으로 떠나는 나는 그들에게 다름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같음을 그들에게서 배우고 확인하기 위해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 마치 환영을 보는 듯한 초록의 아름답고 푸른 산속에서 아바야를 걸친 에미라티 여인의 빛나는 두 눈과 행복한 미소는 내가 그린 아랍에미리트의 지도를 가득 채우고 있다.

갤러리이배 대표